영화의 역사를 일별하다 보면 조금은 흥미로운 영화의 어둠을 발견할 수 있다.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1895)]에서 최초의 장편 영화인 [켈리 갱 이야기(1909)] 사이에서,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1915)]에서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 사이에서, 프레드 니블로 감독의 초기 블록버스터 [벤허(1925)]에서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1941)]까지. 이후로도 영화 역사의 목록은 이어지지만 그사이에 놓인 희미한 어둠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조르주 멜리에스 감독의 [악마의 집(1986)]과 같은 수많은 괴기 단편들에 이어 1925년에 첫발을 내딛은 ‘유니버설 클래식 몬스터’ 시리즈를 지나 윌리엄 캐슬과 그보다는 조금 더 나은 대접을 받는 로저 코먼은 영화의 역사 속에서 그저 스쳐 지나가 버린다.

영화가 만들어지고 산업화하면서 수많은 장르가 탄생했지만 호러만큼 천대받은 장르는 없다. 말초적인 자극을 줄 뿐이며, 천박하고 끔찍하며 우스꽝스럽다는 평가는 여전히 유효하기만 하다. 물론 독일 표현주의와 함께 묶여서 얘기하는 로베르트 비네의 [칼리갈리 박사의 밀실(1920)]이나 빌헬름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1922)] 같은 영화 정도가 이러한 평판에서 벗어나 있을 뿐이다. 심지어는 알프레드 히치콕마저도 [사이코(1960)]를 공개했을 때 다수의 평론가가 엄청난 저주를 쏟아내기도 했다. 심지어 『고어 영화』라는 책의 ‘옮긴이의 말’에서는 한 학생이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데에는 많은 변명이 필요하다”는 리포트를 쓰기도 했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호러 장르를 옹호하려는 목소리 또한 심심찮게 들린다. 스티븐 킹은 “이렇게 터무니없이 적은 제작비로 전 세계 사람을 공포에 떨게 하고 막대한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장르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라며 산업적 옹호를 했으며, 비록 문학을 다룬 것이기는 하나 러브 크래프트는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감정은 공포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것이 바로 미지에 대한 공포이다.”라며 신화적 접근을 택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까지는 이보다 더 분석적인 태도가 유행했다. “공포 영화는 사회적 격변기의 불안감이 투사된 장르로서, 공포 영화에 등장하는 괴물은 당시 사회문화적으로 억압되었던 가치들이 왜곡되고 굴절된 방식으로 표현된 형상이다(백문임 『월하의 공동묘지』).” 존 버거로부터 시작되어 로빈 우드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마르크스주의적 접근 방식이다.

호러 장르에 대한 이처럼 뛰어난 접근 방식에 고전을 통한 또 다른 하나의 접근을 추가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그러자 아킬레우스가 날카로운 칼을 빼어 목 옆 쇄골을 내리쳤다. 그리하여 쌍날칼이 온통 그의 몸속에 잠기자 그는 얼굴을 땅에 박고 길게 뻗었고 검은 피가 흘러내려 대지를 적셨다.” 이처럼 살벌한 내용은 인류의 고전 가운데 한 편인 『일리아스』에서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지는 21권에 등장하는 내용일뿐더러 21권 전체에 걸쳐 이러한 묘사는 계속해서 등장한다. 그다음은 『니벨룽겐의 노래』의 클라이막스에서 배반자 하겐 일당이 수많은 사람을 베어 넘겨 피가 강을 이루고 거대한 불길에 휩싸인 건물 속에서 ‘쏟아지는 불비를 방패로 막으며 발목까지 차오른 피로 타는 목을 축인다.’ 그런 다음 단테는 『신곡』에서 “그는 잘린 머리의 머리채를 손으로 잡아 마치 등불처럼 쳐들고 우리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오, 나를 보라!]”고 외치는 보른의 베르트랑을 묘사한다.

『일리아스』에서 표현되는 숱한 폭력 장면은 오늘날의 슬래셔 영화를 넘어선다. 게다가 『니벨룽겐의 노래』를 읽고 나면 샘 페킨파의 폭력 영화를 넘어 롭 좀비의 [데블스 리젝트(2005)]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신곡』의 이미지는 곧바로 마리오 바바의 [블랙 사바스(1963)]로 이어진다. 수없이 많은 호러 영화가 고전의 이미지를 인용하며 등장했다. 우리는 폭력과 공포에 관한 묘사가 점차 강해져 왔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고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우리는 점점 더 신체 훼손에 무신경한 사회를 접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신과 요정 그리고 죽음의 세계다. 고대 세계에서 신은 무자비한 학살자이며, 요정은 디즈니의 팅커벨이 아닌 사람을 산채로 씹어먹는 괴물이다. 그리고 인간은 죽음과 삶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세계가 펼쳐진다.

인간은 늘 근원적인 두려움을 지녀왔다. 바로 삶의 불확실성과 죽음이다. 이 두 가지는 늘 삶의 확실성과 함께 간다. 그리고 이 삶의 확실성을 담보하고자 역으로 생존의 불확실성을 증대시키는 과시라는 인정행위가 벌어지고 이 때문에 죽기도 한다. 이처럼 삶과 죽음은 늘 함께 가는 것이고, 안정에 대한 욕망과 죽음에 대한 회피가 삶의 기본 욕구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호러 영화 대부분은 죽음을 전면에 내세운 다음 삶의 토대를 뒤흔드는 것이 많다. 게다가 이러한 삶의 역전은 대체로 불가해함을 동반한다. 이유도 원인도 알 수 없는 죽음과 폭력의 물결이 닥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고전이 다루는 세계와 오늘날의 호러 영화가 맞닿고 있으며, 고전적 세계의 현대식 산업적 변용이 바로 호러 장르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결국 호러 영화라는 장르가 영화의 시작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밝은 영화의 세계를 대표하진 않을지라도 가장 많은 영화의 세계를 그려낸 것은 그것이 인간이 쌓아 올린 문화와 감정의 가장 순수하며 직접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CAST 5호]

9 댓글

  1. 소싯적에 누구나 한번쯤은 물에 빠져 죽는 공포감을 경험했을텐데, 그 괴로움과 죽음의 압박감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준 작품은 바로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에서 호텔에 쏟아져 내리던 파도치는

    핏물이었고 두번째는 뤽 베송의 그랑블루에서 장 마크 바의 천장에서 내려오는 물결의 침범이

    점차 아래로 내려와 잠식되는 씬이었다.

    큐브릭을 통해서는 엄습하는 공포와 절규와 영상화 된 반면 뤽 베송의 그랑블루는 압박감과

    동시에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수면에 닿아 몸이 잠식당하는 순간 죽음 너머의 세계로 전환을 맛보게 되면서 끔찍했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끝없는 수면 아래로 유영해 가는 자크를 보면서 일종의 해방감을 맛보게 되었다.

    공포 영화에서 주는 절박함과 쫓기는 심정의 끝에는 결국 삶과 죽음이 피날레를 준비하고 있다.

    우리는 살아있지만 동시에 늙어가고 종국에 닿게 될 죽음을 기다린다.

    먼듯하지만 가깝고, 때로는 너무 성급하게 다가오는 죽음을 피하기위해 발버둥 치는 영화속

    주인공의 비명과 절규는 생경하게 귓가를 울리고 뒤를 쫓는 귀신과 괴물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순간,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우리는 일종의 구원과 마주하게 된다.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공포의 끝에서 우리는 하나의 안식을 얻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