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피막]은 영상자료원 유튜브 채널 – “한국 고전 영화“에서 보실 수 있으며. 아래 글은 영화의 전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한국 무속에서 잡귀는 불행한 인간이 죽어 생기는 것이다. 억울하고 참혹하게 죽은 원혼, 이를 영산(靈山)이라고 한다.1 영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恨)이다. 한은 해결되지 않은 감정, 완전히 연소하지 못한 감정으로 ‘남은 말’이며, ‘못다 한 말’이다. 우리는 이를 ‘미련’이라 표현할뿐더러 죽은 이에게 있어 이 미련을 풀어주는 것이야말로 죽음을 확정 짓고 삶을 완성시키는 일이다. 죽음은 바로 삶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무속에서 쓰이는 말 가운데 ‘살풀이’란 말이 있다. 모든 원혼의 행위가 그러한 것은 아니나 살(殺)은 한으로부터 비롯한다. 삶이 완성되지 못한 원혼(사령)의 악한 충동은 살아있는 자들에게는 치명적인 질병이 되고, 죽음의 마력이 된다. 그러므로 한을 푼다는 것은 죽은 자를 위무하는 동시에 살아있는 자들을 위하는 일이다.

이두용 감독의 1980년 영화 [피막]의 시작은 바로 이 부분부터다. 영화의 오프닝은 마치 신당처럼 꾸며졌으나 이제는 다 쓰러진 폐가로부터 시작한다. 영화의 제목이 화면에 떠오른 다음 영화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이 화면 가득 박히는 가운데 화면은 무심하게 혹은 담담하게 다 쓰러진 폐가의 내부를 조각조각 담아낸다. 바로 이 오프닝이 제시하는 공간이 영화의 제목인 [피막]이다. 영화 속에서 피막은 강가에 자리하고 있다. 강은 예로부터 생과 사를 가르는 경계선의 상징이다. 이 상징적 공간을 배경으로 서있는 피막은 급작스러운 죽음에 이른 자들이 삼도천을 넘기 전에 머무르는 공간으로 소개된다. 죽음의 때에 머무는 장소는 산 자가 점유하는 곳도 아니며 죽은 자가 머무르는 공간도 아니다. 이곳은 산 자의 시선에도 죽은 자의 관심에도 외면받는 곳이다.

‘피막’은 한국의 무속적 사유에서 등장한 공간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피막은 전염병에 걸린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공간으로 몇몇 촌락에서는 “폐처”라는 이름의 오두막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옛사람들은 죽음 자체가 독소를 방출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죽음의 때”라 불렀다. 특히 사람들을 두렵게 한 것은 전란 또는 돌림병 등으로 죽은 원혼인 여귀였다. 조선왕조는 이들 여귀를 위무하는 여제단을 만들어 왕조 내내 여제를 시행했다. 역병이 돌면 감염을 두려워해 시신을 멀리하므로 상례를 제대로 시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이는 유교적 예교사회를 떠받치는 제사공동체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었다. 이처럼 조선왕조는 유교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였으나 이와 달리 민간에서는 귀신이야말로 병원(病原)이라고 생각했다. 여귀는 사적 폭력의 희생자가 아닌 재난의 희생자다. 느닷없는 죽음은 죽음의 때를 느낄 새도 없이 산자를 귀신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이는 사회 전체의 두려움으로 변모한다. 이들을 위한 민간의 사적 위로가 ‘피막’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피막]은 어느 초라한 노파의 모습이 화면에 등장하면서부터 실질적으로 시작된다. 복장과 대를 잡은 모습에서 이 마을에 터를 잡은 무당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다음 전국 팔도의 무당들이 강나루에 속속들이 모여드는 장면이 이어진다. 전국의 무당들이 모여들어 한 집으로 향하는 모습은 압도적인 스펙터클을 선사하는 동시에 노파의 처지와 강한 대비를 이룬다. 이로 짐작하건대 노파는 세습무임을 떠올릴 수 있다. 조선 시대 내내 이어진 천민의식(팔천이라 한다)은 점점 희석되어 왔으나 유독 무당, 그 가운데서도 세습으로 이어진 세습무에 대한 차별은 유난히 강하게 남아 있어 근래의 기록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한 반면에 신내림을 받은 강신무는 그러한 차별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다.

이들 전국 팔도의 무당들은 모두 강진사의 집으로 향한다. 의원의 치료로도 낫지 않는 강진사 아들의 병을 치유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무당과 박수(남성 무당)로 이어지던 굿판은 느닷없이 나타난 구렁이의 등장으로 중단되고 만다. 구렁이는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영물 혹은 요물로 취급되는 동물이다. 뱀은 동아시아 농경 사회에서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동물이다.2 이와 함께 성적 쾌락이나 응어리진 원한의 상징으로도 묘사된다. 게다가 뱀+괴물이 남성형이냐, 여성형이냐에 따라 그 의미 또한 달라진다.3 느닷없는 구렁이의 출현에 당혹스러워하는 박수의 모습은 뱀 자체에 대한 혐오라기보다 해석하기 난감한 사태에 대한 곤혹스러움의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런 구렁이를 한 젊은 무당이 집어 들어 집 밖으로 내보낸다. [피막]의 주인공인 옥화의 등장이다. 옥화의 노련한 판단은 곧 강진사 댁의 신뢰로 이어진다.

옥화는 뱀의 등장을 들어 아들의 병에 원혼이 개입했음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다음에 할 일은 원혼을 추적하는 일이다. 옥화는 정화수를 놓고 기도하는 가운데 슬며시 떨리는 대를 움켜쥐고는 강진사 아들의 몸에 씐 원혼을 추적해 나간다. 한국 영화 사상 가장 인상적인 추적 장면 가운데 하나로 손꼽힐 이 시퀀스에 이어 옥화는 원혼이 묻힌 호리병을 파낸다. 그렇다면 이 호리병 속에 갇힌 것은 누구의 원혼이며, 그 원혼은 어떻게 이 호리병 속에 갇히게 되었을까가 문제시된다. 원혼의 한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야말로 묶인 한을 푸는 기본 중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이제 강진사는 옥화에게 원혼의 사연을 들려주기 위해 가문의 어른들을 소집한다. 이 원혼의 사연은 강진사 가문의 명예(채면)와 관련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제 영화는 호리병 속에 강제로 담기게 된 삼돌이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러나 삼돌이의 이야기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있다. 플래시백을 둘러싼 삼돌이에 대한 회상이라는 액자구조를 지배하는 강진사 가문 어른들의 태도이다. 이 부분은 이미지를 통해 더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이야말로 영화의 주제를 정당화하는 주요 문제이기 때문이다.

1. 강진사 가문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관객은 강진사의 가문을 구성하는 면면들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관객은 유교적 전통 속에서 여전히 양반의 권위를 과시하는 인물과 동시에 유교적 전통에서 벗어나 서양식 복장을 한 근대적인 인물을 동시에 볼 수 있다.
2. 방에 모인 강진사 가문의 인물들이 옥화를 맞이하는 장면이다. 노령에 이른 양반들의 시선이 모두 놀란 표정으로 옥화의 얼굴로 향하다가 마치 정신을 차린 듯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고쳐 잡는다. 게다가 이들 가운데 가장 젊으며 서양식 복장을 한 인물은 탐욕스러운 얼굴로 옥화의 얼굴만이 아니라 몸 전체를 훑어본다.
3. 영화의 2/3가 지난 시점인 강진사의 회상이 끝난 다음 방을 나서는 옥화를 바라보는 인물들의 모습이다. 이들에게 삼돌이의 비극적인 삶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저 옥화를 향한 욕망만이 들끓고 있다.
4. 방에서 나온 옥화를 맞이하는 첫 번째 행위자는 강진사 가문의 가장 막내로 보이는 인물이다. 그의 행위는 옥화에 대한 겁탈이면서 동시에 뒤이어 이어지는 두 번째 행위자로 인해 장유유서에 관한 유교적 예(禮)를 전복한다.
5. 두 번째 행위자는 강진사 가문의 가장 큰 어른인 강진사의 숙부다. 이 장면에서 옥화의 표정이 의미심장하다. 옥화는 양반 가문의 추악한 심연을 꿰뚫어 본 듯이 강진사의 숙부를 체념하듯 받아들인다. 이처럼 회상을 하는 화자인 강진사를 제외한 가문의 구성 인물들은 모두가 권력을 휘두를 욕망에 휩싸인 인물들로 그려진다.

강진사 가문의 가장 막내는 영화 속에서 가장 근대화된 인물로 그려지는 자이다. 그는 방에서 나오는 옥화를 강제로 끌고 가면서 “요즘 세상에 귀신이 어딨어”라고 일갈한다. 그의 눈에는 무당이 행하는 굿 자체가 사기 행위이다. 게다가 그는 이 마을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세력의 일원이다. 그러니 무당을 겁탈한다는 것에 있어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두 번째 인물인 강진사의 숙부는 그야말로 전근대적 인물이다. 그의 복장으로 알 수 있듯이 그는 유교적 가치를 몸속 깊이 체화하고 있는 인물이다. 유교적 가치를 체화했다는 것은 귀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유교적 인물이 귀신을 믿지 않은 것은 아니나 조선을 지배한 성리학 이론에 따르면 귀신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정종실록」의 한 토막을 보자. 이첨은 “사람이 천지의 음양을 받아서 나는데, 음양이 곧 귀신입니다. 사는 것은 신이고 죽는 것은 귀입니다.”라고 말한다. 성리학적 사유체계 내에서 인간은 음양오행으로 구성되며, 죽는 순간 혼(魂)과 백(魄)으로 나뉠 뿐이다. 성리학에서 귀신이란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기의 운동과 조화가 일시적으로 어그러져서 발생한 부정한 기이므로 여기에 어떤 인격성이 담길 여지가 없다. 이러한 사유체계 내에서는 무당이란 그저 일종의 협잡꾼이며 사람을 홀려서 재물을 탐하려는 존재일 뿐이다. 그러니 강진사의 숙부가 옥화를 겁탈할 때 역시 사령이나 원혼 따위를 떠올릴 리 없이 그저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권력 의지만이 발현될 뿐이다.

강진사의 회상에서 그려지는 것은 조선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상대적 혹은 절대적 약자의 삶이다. 피막이 삶의 공간이 아니듯이 피막을 관리하는 삼돌이는 산 자이나 산 자의 삶에 속하지 못한다. 이와 함께 강진사의 계수인 며느리 이씨 역시 수절이라는 죽음에 근접한 삶을 사는 존재이다. 중국 역사학자인 전여강은 “충절을 위한 자기희생은 실제로 여성들에게만 강요된 도덕적 의무4”라고 말한다. 삶과 죽음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그 경계에서 살아가는 이 두 사람이 피막에서 만나게 된다는 것은 사회 구조적 측면에서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 계층의 담을 허무는 것은 어느 계층 사회건 용납받지 못하는 행위이다. 며느리 이씨는 수절이라는 형식을 가장한 채 살해당하고, 삼돌이는 강진사댁 노마님(황정순)이 불러온 판수(귀신 쫓는 일을 하는 이들)들에 의해 영혼이 뽑혀 호리병에 강제로 봉인 당한다.

삼돌이에 관한 회상이 끝난 다음 옥화의 첫 번째 진실이 밝혀진다. 옥화는 영화 초반에 등장한 마을 무당을 찾아가 자신이 꾸는 꿈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신이 내리는 꿈이다. 여기서 재밌는 것이 옥화가 애초 무당이 아님을 확실하게 알아보았던 인물이 바로 이 늙은 무당이라는 것이다. 영화 초반 전국 팔도의 무당이 모였을 때 이 노파는 무당들의 면면을 보며 예천, 경기, 전라, 경상 등 무당의 주 활동무대를 맞추는 와중에 카메라가 무심하게 슬쩍 지나가는 옥화의 장면에서는 “저건 또 뭐야”라고 내뱉는다. 사람들에게 가장 무시당하던 이 노파야말로 강진사댁에 모인 모든 무당 가운데 가장 뛰어난 무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옥화에게 신내림 굿을 하는 존재 또한 이 노파의 역할이 된다.

[피막]은 전체가 명확한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일종의 원혼 추리극이라 할 수 있다. 전국 각지의 무당이 몰려들었지만, 이들의 굿은 실패하고 만다. 한국의 무속에서도 원혼을 위무하는 첫 번째 행위는 가톨릭의 엑소시즘처럼 원혼의 이름을 아는 것이다. 그가 누구이고 어떤 한을 품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을 푸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용한 무당이라도 이 첫 번째 굿판에서는 실패하고 만다. 두 번째는 살귀로 거듭날 원혼을 미리 방지하는 일이다. 이는 일종의 퇴마극이라 할 수 있다. (귀)신을 몸에 불러들여 원한을 풀어가는 무당과 달리 장님 남성으로 구성된 판수는 귀신을 강제로 쫓아내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판수는 무당과 대립 관계에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한국 영화에서 주로 등장하던 여성 귀신의 귀환을 대비하는 것이 아닌 남성인 삼돌이의 혼이 귀환하지 못하게 봉인한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억울한 죽임을 당한 며느리 이씨는 그저 자살로 위장한 채 시신이 강에 버려지고 만다. 그러나 삼돌이의 영혼은 판수들의 독경의 통해서 겨우 호리병 속에 잡아넣는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 사회 가족 콤플렉스의 일단을 볼 수 있다. 융에 따르면 콤플렉스란 병적이거나 열등한 것이 아니라 심리적 구성 요소들로서 여러 가지 강한 감정으로 뭉친 심리적 복합체를 말한다.5 콤플렉스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그들이 무의식에서 오랫동안 억압되어 있을 때이다.

강신사댁 노마님의 며느리 이씨에 대한 측은지심이 이씨와 삼돌이에 대한 살해 욕망으로 변형되는 데는 유교적 가치체계의 억압이 내면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교 체계는 그다지 단단한 논리적 기반을 유지하는 체계가 아닐뿐더러 언제라도 손쉽게 무너질 수 있는 체계이다.6 이러한 가치체계 속에서 생시의 한을 풀어줬을뿐더러 가족의 일원이기도 한 며느리 이씨의 원혼은 귀환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교 사회의 심리적 복합체(콤플렉스)를 유지하는 의식을 깨부수고 들어올 수 있는 존재는 그 의식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양반적 가치와 고스란히 대립하는 삼돌이라는 천민의 존재이다. 그러므로 삼돌이는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봉인해야 하는 존재이다.

강상순은 『귀신과 괴물: 조선 유교사회의 그림자』에서 “원귀나 여귀는 사회 공동체에서 억압과 폭력, 희생이 빈발하는 지점, 그리하여 원한과 분노가 응결되어 있을 것이라고 상상되는 지점에서 출몰한다. 그것은 사회 공동체의 결함과 무능 때문에 의도적으로 혹은 비의도적으로 발생하는 재난의 희생자들에게 살아남은 주체들이 지니고 있는 죄책감·부채의식 속에서 생성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옥화는 이러한 사회 공동체의 무능과 죄책감을 해소할 인물로서 등장한다. 만약 [피막]이 단순한 복수극일 뿐이었다면, 옥화를 며느리 이씨와 삼돌이 사이의 자식으로 설정했겠지만, 옥화는 삼돌이가 피막 지기를 하기 전에 다른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로 설정되며, 옥화의 어머니는 조선에서 가장 큰 무당이라는 설정이다.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옥화의 오구굿(굿의 명칭은 지역마다 다르다)에서 완성되는 복수 혹은 살(殺)의 실현은 이러한 측면에서 전근대적 근대에서 현대로의 전화기에 필연적으로 털어내고 갈 수밖에 없는 사태의 일단을 보여준다. 옥화는 죽은 삼돌이의 혼이 강진사 아들의 몸에서 떠날 수 있게 온 힘을 다해 굿을 하며, 그 와중에 옥화를 겁탈했던 두 인물과 비극의 단초를 제공했던 강진사댁 노마님이 사고로 죽게 된다. 그런 다음 옥화는 남겨진 원혼들을 위무하는 동시에 남겨진 복수를 위해 강진사를 피막으로 유인한다. 옥화와 강진사가 피막으로 이동한 후 깨어난 강진사의 아들은 남겨진 흔적들을 통해 최대한 합리적 해석을 총동원해서 이 모든 죽음이 우연이 아닌 조작된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지만, 그것이 조작된 살인의 현장인지 아니면 살귀의 작용인지는 영화 내에서 설명되지 않으며 관객의 몫으로 남겨진다.7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이 영화가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단순한 복수극이 아닌 그 너머에 있음을 드러낸다. 옥화는 피막 내부에 작은 신당을 꾸미고는 그곳에서 죽은 원혼들을 불러낸 다음 그들의 한을 직접 들어줌으로써 수십 년 혹은 피막이 존재한 오랜 기간 동안 묶이고 얽혔던 원혼들의 한을 풀어준다. 그런 다음 옥화는 마지막 원혼인 아버지 삼돌이를 위해 복수를 감행하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복수를 포기하고 만다. 옥화는 강진사를 죽이고자 피막 밖으로 도망가는 강진사를 쫓아가지만, 그곳에서 강진사를 살리기 위해 뛰어오는 강진사 아들(동경 유학까지한 현대와 합리성을 대표하는 인물)의 모습을 목격한다. 바로 이 순간 옥화는 희미한 미소를 지은 후 피막으로 다시 들어가 피막 전체를 불태우고 만다. 이 마지막 장면이야말로 구세계의 종말의 제시하는 동시에 강진사의 아들이 상징하는 현대적 의식으로의 전환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종교(religion)는 라틴어 religio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주의 깊은 관찰을 뜻한다. 그렇다면, 주의 깊은 관찰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종의 객관화다. 파편화된 정보를 긁어모아 그것을 정리하고 탐색하는 것, 그 후에 정돈된 것을 받아들이고 이를 미래로 밀고 나가는 것은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단절을 위해서는 역으로 과거의 정보가 필수적이게 된다. 이를 통해 생겨난 것에 강한 의미와 믿음을 부여할 때 그것은 종교가 되며, 반성의 자료로 삼을 때 그것은 사회적 의식으로 자리 잡는다.

[피막]에는 옥화의 미소가 두 번 등장한다. 강진사의 숙부를 바라보며 짓는 절망적이며 허망한 웃음과 강진사의 아들을 바라보며 짓는 체념의 미소가 그것이다. 그러나 전자가 한을 쌓아 올리는 강한 정동의 미소라면, 후자는 이처럼 비극적인 시대를 마감해야 한다는 결단의 미소이다. 그건 체념이자 한 사회에 대한 포기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권력에 대한 종말을 의미하는 미소이다. 이두용 감독은 [피막]을 쉬어가는 의미에서 만든 영화라고 한다. 그러나 21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이 영화를 단지 쉬어가는 영화로 보기는 어렵다. [피막]은 여성만이 아니라 약자에 대한 모든 착취와 억압이 실은 권력의 문제이며, 그러한 권력의 억압을 당연시하며 추앙하는 한국 사회의 콤플렉스에 관한 문제이다. 그리고 [피막]은 그러한 권력의 문제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문제임을 보여준다.

  1. 최길성, 『한국 무속의 이해』 예전사
  2. 우리는 집에 터를 잡은 구렁이를 집을 지키는 신령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3. 강상순, 『귀신과 괴물: 조선 유교사회의 그림자』 소명출판
  4. 전여강, 『공자의 이름으로 죽은 여인들』 예문서원
  5. 이부영, 『한국의 샤머니즘과 분석심리학』 한길사
  6. 강명관은 『안쪽과 바깥쪽』에서 이러한 성리학 이데올로기의 유지를 탐색하고 있다
  7. 영화 초반 호리병을 가져왔다 급사하는 김서방 역시 이중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옥화에게 정보를 주는 대가로 옥화의 몸을 탐한 김서방은 옥화에 의해 독살을 당했을 수도, 급살을 맞았을 수도 있다. 영화 초반에 그려지는 몇몇 장면처럼 옥화는 아직 내림굿을 받은 정식 무당은 아니지만, 몸에 신이 깃든 선무당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무당에게는 살과 복을 가져다주는 신들 외에 보호 신령들도 따라붙는다

14 댓글

    • [피막]과 [최후의 증인]의 촬영 감독이 다름에도 비슷한 정서를 느끼게 하는 건 아마도 [최후의 증인]에 이어서 [피막]이 곧바로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게다가 [최후의 증인] 때 이두용 감독이 너무 고생을 해서 쉬어 가는 마음으로 만든 영화가 [피막]인 만큼 전작의 정서가 계속 이어지기도 할 것이고, 주로 액션 영화([속 돌아온 외다리]는 유튜브에서 검색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를 찍던 이두용 감독이 1978년에 [초분]을 찍으면서 한국의 토속적 삶에 관심을 두고 [물레야 물레야]와 [뽕]으로 이어지는 영화를 찍은 만큼 그 관심사와 정서도 계속 이어진 듯합니다.
      위에 언급한 [속 돌아온 외다리]는 많은 부분 삭제가 된 듯하지만, 한국 액션 영화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꽤 재밌게 보실 수 있을 뿐더러 류승완 감독이 만든 [짝패]의 이미지가 어디서 비롯했는지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ㅎㅎ

        • 그렇겠군요 ㅎㅎ 제생각도 비슷합니다,
          피막이나 최후의 증인에서 짧게 액션무브(?) 나왔을때 이감독님 액션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구나 했는데 필모그래피 보니 더 놀랐습니다 다양한 장르가 가능하신분이라니 ㄷㄷ

      • 닥두님 추천 덕분이 저도 영화 봤습니다. 다른거 다 떠나서 삼돌역을 남궁원 배우가 맡았다는게 제일 충격이었습니다. 영화 보는 내내 ‘오프닝 크레딧에는 남궁원 아저씨가 나온다고는 했는데 왜 안나오지…’ 이랬네요 ㅋㅋ 분장도 그렇고 이런 역할로 나오시리라 전혀 상상을 못해서…ㅎㅎ

        그리고 유지인 배우의 미스테리하면서도 세련됨과 동시에 단호함이 묻어나오는 외모가 배역에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확실히 뭔가 압도적인 그런 분위기가 있더군요.

          • 늘 근엄한 연기를 보여줬던 남궁원 아저씨의 삼돌이 연기는 정말 좋았습니다. 게다가 80년 당시에는 보기 드문 단단한 근육의 삼돌이=남궁원인데 눈이 안 맞을 수가…ㅎㅎㅎ
            이 영화에서 유지인 누님의 분위기는 정말 좋았습니다.

          • 피막은 아직 못 봤지만 시간 내서 꼭 보겠습니다~ 리뷰 감사합니다 닥두님~
            이두용 감독님 작품을 많이 못 봤는데(또는 봤지만 너무 어릴 때 봐서 기억이 안 나는 것일 수도 있고), 저는 감히 김기영 감독님 다음으로 배테에서 특집을 해 주셨으면 하는 한국 감독님이기도 합니다.^^; 괴작들도 있지만 굉장히 힘이 있는 연출(심지어는 액션이 없는데도 흐르는 긴장감이라던가), 그러면서도 당대 대중성과 어느 정도는 타협하면서 작품활동을 이어가셨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예전에 다른 댓글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저는 “내시”가 기억에 남습니다.(유튜브에 있더군요.) 이두용 감독님 최후의 걸작이라고 보통 간주되더라구요. 혹 안 보신 분들께는 추천드립니다.

              • 저 역시 이두용 감독님 영화는 그리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던 영화가 남기남 감독님의 [뒤돌아 보지마라]와 이두용 감독님의 [돌아온 외다리]였지요. [속 돌아온 외다리]는 유튜브에서 볼 수 있지만, [돌아온 외다리]는 영상자료원에 가야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이번에 이두용 감독님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20세기 한국 영화에서 영화의 작품성을 떠나서 순수하게 영화를 가장 재미있게 만드는 감독이 이두용 그리고 이만희 감독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네요. 그리고 [내시]는 제목 때문에 안 보다가 이번에 보게 됐는데, 개인적으로 가상 역사극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ㅎㅎ

                  • 말씀하신 두 편은 못봤어서 나중에 꼭 찾아보겠습니다~
                    (돌아온 외다리를 어찌 찍었을까, 외팔이도 힘들었다는데, 그러고 찾아보니 그냥 다리는 있는데 다쳤다는 설정인가 보더라구요. 흐흐~)
                    [돌아이] 같은 영화도 당시에는 색다른 느낌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나중에라도 꼭 이두용 감독님 특집을 부탁 드리옵니다~^^
                    [내시]는 오늘 알았는데, 신상옥 감독님의 68년작 [내시]의 리메이크였더라구요. 이 영화가 가지는 힘이 각본인지, 오리지널인지, 아니면 이두용 감독님 솜씨인지 비교하면서 봐도 좋을 듯 합니다. 종반에 궁궐 복도씬은 정말 대단한 힘이 있었다고 기억 하네요.

                      • [속 돌아온 외다리]는 외다리가 나오지 않습니다.ㅎㅎㅎ [돌아온 외다리]는 악당에게 당해 다리가 잘린 주인공이 잘린 다리를 강철 다리로 바꾸고 복수하는 내용인데, 다리를 강철로 바꾼 후 주인공이 죽을 줄 알고 만들었던 무덤에서 자신의 묘비를 박살내고 복수를 하러 떠나는 장면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네요. 신상옥 감독님의 [내시]는 아직 보지 못했는데, 영상자료원 유튜브에 올라가 있으니 조만간에 봐야 겠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내시의 강렬한 힘은 이두용 감독님의 솜씨가 아닐까 하네요.ㅎㅎ

                  • 역시 닥두님의 리뷰는 꼼꼼히 영화를 여러 시각에서 들여다보고, 이를 풀어내는 닥두님의 필력에 감탄하며 잘 읽었습니다. 아직 보지 못한 영화지만 내일 일요일 오후에 꼭 봐야겠어요! 감사해요. 좋은 영화 추천요. 전 처음에 태국영화 말하는 줄 알았는데 한국 영화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