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 중 97%는 쓰레기이고 3%만이 훌륭한 것이기 마련이다. 그러니 그 3%를 잘 보호해야 한다.” ( 부산을 찾은 화제의 거장들 ) 피터 그리너웨이가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했던 이 말을 우리는 2004년 1월 8일 〈정은임의 영화음악〉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들었던 적이 있다. ( 04.01.28-정성일-한국 영화 ) 정성일은 한국영화를 정리하면서 마지막에 덧붙이기를 “영화를 너무 많이 보지 마십시오. 영화는 대부분 쓰레기입니다. 좋은 영화는 정말 적습니다.”라고 말한다—녹음되어 웹에 올려진 이 발언들은 그 내용에서도, 그 형식에서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한 감독과 한 평론가가 한 이 말은 사람들에게 대체로 같은 방식으로 소비된다. ‘니들이 영화를 봤으면 얼마나 많이 봤다고!’ 혹은 전 생애 동안 7만 편이 넘는 영화를 소비했던 영화광을 거론할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고작 백 년이 조금 넘은 영화 역사에서도 한 사람이 모든 영화를 다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말은 박찬욱이 자신은 영화광으로서 19,283편의 영화를 봤다는 농담과도 조금은 비슷하다. 이는 독자가 일종의 배경 지식이 있음을 전제하고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평론가인 정성일의 주장은 잊을 만하면 뽑아져 나오는 ‘영화 백 년, 영화 백 편’ 리스트에서 겹치는 “좋은 영화”의 명단을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그 명단에는 《시민 케인》이 있으며, 《길》이 있고, 프랑수아 트뤼포가 있다. 이렇게 시네필들이 주워 먹었던 지식, 혹은 『세계영화사』에 등재되어 살아남은 고작 수백 편의 영화들이라는 배경 속에서 피터 그리너웨이가 말한 “3%”라는 또 다른 배경을 알아가길 바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영화는 고작 백 년밖에 안 된 예술이기 때문에 그 예술이 이 위대한 수천 년의 전통을 가진 예술들을 이긴다면 그것은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피터 그리너웨이는 훌륭한 3%만을 뺀 나머지를 모두 쓰레기라고 말한다. 백분율 아래에서는 97%가 쓰레기인 것이 된다. 대체로 사람들은 이 3%에 주목하기보다는 97%라는 이 어마어마한 수치에 주목한다. 그래서 우리가 느끼기에 우리는 거대한 쓰레기 더미—혹은 시궁창—속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아니 그럼 우리가 시궁창 속에서 뒹굴고 있느냐고 반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너웨이의 주장에서 97%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에게는 정말로 훌륭한 것들, 인류 역사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을 표현할 수 있는 ‘3’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서구의 전통에서 ‘3’은 완전함을 의미한다. 가장 안정된 구조인 삼각형으로부터 가톨릭의 삼위일체까지. 서구 교양의 한 정점에 놓여 있는 단테의 『신곡』을 살펴보자. 『신곡』 전체는 100곡으로 구성된다. 지옥편 34곡, 연옥편 33곡, 천국편 33곡. 하지만 제1곡은 전체의 서곡으로서 ‘신곡 총서’라고 말해지므로 각 편은 33곡으로 이루어진다. 즉, 각 편은 3의 배수로 구성돼 총 3편을 이루어 전체 99곡이고, 여기에 서곡이 붙어 완전수인 100곡으로 전체를 완결한다. 이와 함께 각 곡의 구조 역시도 지옥편을 묘사한 9개의 감옥과 같이 3의 배수인 자연수 9로 이루어지게 된다(박찬욱의 농담 역시 자연수 내에서 이루어지는 농담이다).

이처럼 서구 교양에서 ‘3’은 ‘완전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리너위이의 주장은 다른 말로 정성일의 말인 “좋은 영화는 정말 적습니다.”와 겹쳐진다. ‘완전한 영화’는 그만큼 적기 때문이고, 수십만 편을 넘어서는 영화 가운데 ‘영화사’에 이름을 올린 영화는 고작 해야 수백 편일 따름이며, 나머지는 그 시대의 산업 속에서 소비되고 사라질 운명일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저 한 줌의 ‘좋은 영화’가 아니라 그 ‘좋은 영화—혹은 인간이 만든 훌륭한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식견이다. 바로 오늘날 한국인 대다수가 우스꽝스럽게 치부하는 ‘교양’을 말한다.

우리가 지식으로서의 교양을 습득할 때 이들 감독과 평론가가 하는 말의 일정부분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들은 그들의 지식과 기술을 팔아 생존하는 자들로서 지속적인 학습이야말로 필수조건인 이들이다. 그들에게 긴 시간은 주어지지 않으므로, 또는 많은 지면이 주어지지 않으므로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조건에 맞춰 지식을 압축하며 독자를 설정하게 된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지식 교양은 말/글의 맥락을 파악하게 해주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쓰레기’라는 주장에는 정성일의 다음과 같은 의미 역시 포함되기 때문이다. “영화를 만든다는 과정 자체는 당신이 살고 있는 자본주의 안에서 함께하고 있는 것입니다.”

쓰레기라는 말에 발끈한다는 것은, 실은 ‘쓰레기’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좋은 쓰레기와 나쁜 쓰레기를 가장 잘 알아보는 사람은 ‘넝마주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시의 골목 곳곳에 널린 쓰레기를 끝없이 수집하고 분류하는 작업. 이러한 지속적인 반복과 경험 그리고 학습이 몸에 익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이렇게 몸으로 익힌 것을 통해 도시 공간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그러한 쓰레기가 버려지는가 하는 그 구조를 익히고 있기 때문이다. 쓰레기의 배출은 도시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플로베르를 읽건, 이문열을 읽건 그 사회의 구조—역사를 알지 못하고는 사태를 올바로 바라보기 어렵다.

교양은 다른 말로 인문학의 체화, 곧 몸으로 익히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소비되고 버려지는 것을 그 종말의 시점에서 쓰레기라고 부른다. 산업사회의 부수물들은 대체로 이와 같은 과정을 겪게 마련이다. 비록 그것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이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 자체로는 개인 소관이며 사회적으로는 그저 쓰레기일 뿐이다. 그리고 영화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이 같은 과정 사이에 개입하는 것이 평론가이다. 사회적 발언을 던지곤 하던 누군가 “평론은 기생”이라고 했을 때 이는 절반은 맞는 말이지만 절반은 틀린 말이기도 하다.

평론은 영화라는 대상의 해석을 전제로 한다. 이마미치 도모노부는 “해석이란 의미 발견이 아니라 의미 부여”라고 말한다. 곧 영화의 납골당에서 한 편의 영화를 선택해 의미를 부여해 다시 살려내는 것이 바로 평론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영화평론은 영화라는 대상이 없으면 존재하지 못하는 ‘기생’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한 존재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창조적인 작업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쓰레기의 발굴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발굴되는 모든 것이 생명을 얻는 것은 아니며 대부분은 결국 쓰레기로 버려질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영화들에 의미가 부여되고 생명을 되살리게 될까? 시대를 초월하는 작품들? 시대를 초월하는 작품이란 그 행위를 시작하게 한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영예이다. 어떤 작품에 의미가 부여된다는 것은 결국 그 시대가 가장 잘 드러나도록 담은 작품들이 대상이 될 따름이고, 이는 그 시대를 알 수 있는 역사적인 안목과 그 시대를 지배한 의식을 추적할 수 있는 교양으로서 가능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