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리플리’ 씨가 그토록 사람들의 관계 속으로 깊숙이 들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너무나도 순수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돈으로 풍류를 즐기는 ‘필립’이나 필립만을 바라보며 자신만의 세계를 쌓아가는 ‘마르주’가 각종의 이익관계로부터 떨어져 있는 반면에 자신의 사업을 꾸려가는 냉정한 사업가인 ‘프레디’는 리플리에 대한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물론 프레디가 리플리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는다는 말은 아니다. 이익 관계의 부대낌에서 낯선 이를 의심하는 것은 사업가의 버릇과 같기 때문이다. 친절한 리플리 씨는 가장 적절한 순간에 자신과 동류의 인간들을 발견했고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 욕망이 시키는 데로 행한다. 그게 살인이든 무엇이든 간에.

구세대와의 단절을 선언하며 등장했던 시기의 영화들 가운데 몇몇은 과거 ‘세리 누아르’를 재발견하게 한 ‘필름 누아르’를 자신의 손으로 다시 만들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할리웃 영화에 닳을 대로 닳은 시선의 고전 영화 팬들에게 이 프랑스의 영화들이 펼치는 풍경이 이국적인-낯선-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유럽의 장인들을 할리웃으로 끌어들여 표현의 극단을 펼쳐보인 영화들의 반대쪽의 풍경을 담아내는 사실적인 풍경과 그 낭만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그려지는 지독한 ‘범죄’ 혹은 ‘욕망’ 때문일 것이다. 《네 멋대로 해라》에서와 마찬가지로 《태양은 가득히》에서 벌어지는 범죄 역시 단순한 물욕으로 설명하기에 어려운 것들이다. 고다르가 표현한 ‘미셸’의 최후와 클레망이 표현한 리플리의 최후는 할리웃이 표현한 지독한 심연으로의 추락과는 달리 먹먹한 심리적 이완을 경험하게 한다.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쇠몽둥이의 충격이 아니라 온통 하얀 천으로 둘러싸인 허망함.

영화 《태양은 가득히》는 ‘알랭 드롱’ 아니 ‘아랑 드롱’을 빼놓고는 말할 수가 없다. 흔해빠진 표현마냥 “조각 같은 외모”를 가진 이 배우가 만들어내는 ‘리플리’라는 인물은 원초적인 욕망만을 간직한 인간의 전형을 창조해낸다. 같은 시기의 ‘장폴 벨몽도’가 만들어낸 ‘미셸’보다 더 욕망에 충실하며 현대의 용어로 ‘악마적’인 순수함을 표현하는 이 인물은 ‘나르시스’의 완벽한 재현으로 보일 지경이다. 그가 필립을 정확히 흉내 내는 그 거울 씬에서 그는 필립을 흉내 낸다기보다는 자신의 이미지를 탐욕스럽게 갈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기, 프레디의 살해 직후 이어지는 ‘식욕’의 순서는 이 인물의 냉정함 따위를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진실로 충실한 인간의 전형을 창조해낸다. 이후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나의 것》에서처럼 가장 순수한 인간을 표현하는 한 전형.

영화의 마지막 태양 가득한 해변에서 한가로운 한 때를 보내는 이 인물은 모든 범죄가 드러난 ‘어둠’을 향해 아무것도 모른 채 걸어 들어가며 만족에 이른 미소를 짓는다. 여기서 카메라는 더는 그를 쫓기를 멈추고 태양이 쏟아지는 해변에 시선을 고정해 두려 한다. 이후는 관객이 알아서 상상하기? 아니 그따위 어두운 상상이 아니라 바로 그곳이 이 욕망의 끝이었고 더는 할 얘기도, 보일 것도 없기 때문이다. 뜨거운 태양에 등이 익어가며 벌렸던 살인인 욕망의 실천과 이 욕망이 실현됐던 마르주와의 결합. 더 무슨 이야기가 필요하겠는가. 이 만족한 욕망은 언제나 도덕과 충돌하게 마련이고 이는 영화 바깥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