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없이 많은 SF 영화들이 대체로 창조와 파괴를 다룬다. 물론 대체로 잘 만든 SF 영화들은 인간의 오만으로부터 창조된 피조물과 이로 인해 벌어지는 파괴를 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창조와 파괴는 하나의 순환과 같아서 이야기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문명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SF 영화들도 있다. 이를테면 SF의 걸작 가운데 한 편으로 손꼽히는 로버트 와이즈의 1951년 작 [지구 최후의 날]은 전쟁과 반목으로 얼룩진 지구 문명을 단 한 순간에 잿더미로 만들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에서 다룬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은 SF 영화에서 자주 다뤄지는 주제다.

뤽 베송 감독의 1997년 작 [제5원소]는 이처럼 진지한 SF 영화들과는 달리 순수한 오락 영화처럼 보이는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은 [다이 하드]의 액션 스타인 브루스 윌리스이고 그가 영화 내내 펼치는 액션은 마치 [다이 하드]의 무대를 우주로 옮겨 놓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제5원소]는 1914년 이집트를 배경으로 시작한다. 한 고고학자가 신전의 상형문자를 해독하려 애쓰고 있는 순간 거대한 우주선이 그곳에 착륙한다. 그리고 우주선에서는 한눈에 보기에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외계인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복장일 뿐 영화가 진행되면 이들이 우주 역사에서도 가장 지적인 존재들임이 드러난다. 외계인은 5,000년마다 반복되는 순수 악에 대항하기 위한 무기를 이집트에 숨겨뒀고, 때마침 이 무기를 회수하러 온 참이다. 그들은 300년 뒤 위기가 닥치면 이 무기를 돌려주겠다고 말한다.

시간은 300년을 건너뛰어 이집트의 외계인이 예언한 위기의 순간이 다가온다. 거대한 검은 구체 형상의 순수 악은 시시각각 지구를 향해 다가오고, 이 지적인 외계인은 무기를 돌려주려 지구로 오지만 악당들에 의해 우주선이 파괴당하고 만다. 그러자 지구인은 DNA 복제 기술을 이용해 우주선 폭발에서 팔 한쪽만 남은 외계인을 되살려 내고 이 존재가 바로 악에 대항할 무기를 작동할 수 있는 “제5원소”임이 밝혀진다. 그런데 도대체 ‘제5원소’란 무엇일까? 바로 이 지점에서 뤽 배송 감독은 순수한 SF 오락 영화를 만드는 동시에 그가 서구 고전, 정확히는 그리스 고전에도 관심이 있었음을 드러낸다. 그 관심은 고대 그리스의 4원소 설과 함께 창조와 파괴의 순환적 세계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어떻게 지켜야 할 것인가를 제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원소라고 하면 보통 118개의 원소가 정리된 주기율표를 떠올린다. 혹은 서양 고전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불, 물, 공기, 흙이라는 4원소를 떠올릴 수도 있고, 동양 고전에 관심이 있다면 불, 물, 나무, 쇠, 땅이라는 오행설을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제5원소]는 프랑스 감독이 만든 영화이니 4원소를 대상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우선 서구의 원소설(혹은 원자론이라고도 하며 『자본론』의 저자인 마르크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을 살펴보자. 기록된 내용으로 남아 있는 원소설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그리스의 초기 철학자인 테아게네스가 남긴 말이다. 그는 위대한 서사시인인 호메로스를 언급하면서 호메로스가 신들에 관해 말한 것이 실은 우리의 주변을 구성하는 원소들을 신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불은 아폴론과 헤파이스토스로, 물은 포세이돈으로, 달은 아르테미스 그리고 공기는 헤라 여신이라는 식이다.

테아게네스 이후에는 아낙시만드로스가 세상의 근원이 되는 원소는 공기라고 주장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공기는 모든 것을 포함하며, 세상의 모든 것을 조종할뿐더러 사멸하지도 않고 파괴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아낙시만드로스 이후에 등장한 철학자인 파르메니데스는 만물은 불과 흙 이 두 원소로부터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고대 그리스, 그리스인들』을 쓴 H. D. F 키토는 이런 단순함이야말로 고대 그리스인의 위대한 특징이라고 말한다. 이제 기원전 5세기 초에 이르면 이 주제를 설명할 한 명의 철학자가 등장한다. 그는 엠페도클레스로 의사이면서 동시에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연설가이자 교사(이러한 인물들을 수사가라고 한다)였다. 그는 『자연에 관하여』라는 자연철학에 관한 책을 썼으며 이와 함께 『정화의례들』이라는 제의에 관한 책과 함께 『의술론』이라는 의료 기술에 관한 책을 쓰기도 했다.

엠페도클레스는 세상의 만물이 네 가지 뿌리인 불, 물, 공기, 땅이라는 4원소로 이루어져 있음을 최초로 주장한 철학자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 네 가지 원소가 그저 뒤섞여서 물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원소들이 마치 레고 블록처럼 맞물리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오늘날 원자를 구성하는 전자를 떠올린다면 놀라운 직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 [제5원소]는 4원소가 아닌 ‘5원소’를 말하는 내용이다. 영화 속에서 표현되는 제5원소는 외계 존재인 리루라는 여성으로 인간과 동일한 형상을 하고 있다. 이 제5원소는 무엇에서 나온 것일까? 답은 “사랑”이다. 엠페도클레스는 네 개의 원소를 각각 말한 다음 이것들의 원인이 사랑과 불화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불화는 “스파이로스(Sphairos-영어 Sphere의 기원이 되는 단어)”, 즉 둥근 구(球)로 구성돼 있다고 말한다. 바로 영화 속에서 지구만이 아니라 우주를 파괴하기 위해 다가오는 시커먼 둥근 물체가 바로 엠페도클레스가 말한 불화이다.

[제5원소]의 절대 악인 둥근 구체는 인류가 만든 어떤 무기로도 파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를 흡수해 더욱 커져간다. 마치 불화를 무한히 흡수하듯 그렇다. 이처럼 절망적인 구체의 행태는 엠페도클레스가 말한 “스파이로스(Sphairos)는 주변을 감싸는 고독을 즐기고…오히려 모든 방면에서 자신과 동등하며 전적으로 무한한 자”에 걸맞은 그런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불화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사랑’뿐이다. 물론 이는 영화의 설정이다. 엠페도클레스는 사랑과 불화의 싸움을 통해 세상이 생성과 파괴를 반복한다고 말한지만, 보통 엠페도클레스의 주장에서 사랑은 결합의 원리로 불화는 분리의 원리로 이해된다. “증오(Kotos) 속에서는 저마다 다른 모양이고 모두 뿔뿔이 흩어지지만, 사랑(Philotēs) 속에서는 모여들고 서로를 간절히 바라네” 남겨진 엠페도클레스의 말에는 이런 말도 있다.

이와 함께 잘린 팔 한쪽으로 주인공이 ‘리루’를 되살려내는 묘사도 어느 정도는 엠페도클레스의 주장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이 장면은 마치 스티븐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에서 남겨진 DNA 가닥으로 공룡을 복원하는 것보다 더 황당한 묘사이긴 하다. 하지만, 엠페도클레스는 인간의 정신은 피에 깃들어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신체 부위보다 피에 원소들이 가장 잘 섞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영화 [제5원소]를 구성하는 데 일정 부분 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제5원소]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전쟁과 반목 대신 사랑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수많은 SF 영화에서 쓰였지만, [제5원소]처럼 코믹하면서도 신나는 액션 영화에 쓰였기에 큰 부담 없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전쟁과 파괴. 엠페도클레스는 “오 가련한 이여, 비참한 가사적(죽을 수밖에 없다는 뜻)인 족속이여. 지독히도 불운한 자여. 너희는 이런 투쟁들과 탄식 속에서 태어났구나.”라고 말한다. 이 문장은 영화 속에서 주인공 리루가 인류의 역사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전쟁과 살육을 목격하고 절망하는 장면에 꼭 들어맞는다. “그러므로 너희가 무서운 악으로 말미암아 얼이 빠져 있는 한, 너희는 절대로 비참한 고통에서 마음을 구해내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감정의 절망을 구해내는 것은 과거에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결국 ‘사랑’이다. 영화는 리루(밀라 요보비치)와 코벤(브루스 윌리스)의 달콤한 사랑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이 마지막 장면에서 진정 마지막으로 엠페도클레스의 마지막 말을 떠올릴 수 있다. “악을 멀리 하라.”1 영화 첫 장면의 시간적 배경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해이다.

  1.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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