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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귀신 이야기 - 4월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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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04-03 16:42
조회
89
오늘 문재인 대통령과 군경 최고책임자가 최초로 제주 4.3 추념식에 참석하셨군요.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05년 4월 3일에 쓴 글입니다.



“뒤에서는 국군들이 막 총을 쏘면서 좇아오고, 난 니 할머니 손을 잡고 막 도망치고 있는데, 갑자기 니 할머니 손이 ‘툭’ 떨어지는 거라. 니 할머니 팔에서 피가 막 콸콸 쏟아지고 나는 주저앉아서 울고 있는데, 니 할아버지가 나를 들쳐 없고 도망갔다 아이가”

70 년대 후반의 제주도는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었음에도 마치 민속촌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 만큼 많은 초가집과 돌담들이 남아 있었다. 특히나 제주시에서 버스로 20여 분을 더 들어가는 2호 2동의 대부분은 위풍당당(?)한 초가집에 집집마다 똥돼지를 키우고 있기도 했었다. 물론 지금의 시선에서야 그렇지만 당시에 내가 살던 부산 집 역시나 진흙과 짚을 이겨 만든 흙벽에 시커먼 아스팔트유가 칠해진 두꺼운 종이로 지붕을 얹은 집에서 월세를 살았으니 오히려 더 참담한 수준이랄 수 있겠지만, 어쨌거나 그 시절 제주의 인상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돌이 많은 촌의 모습 그것이었다.

똥돼지 두 마리에 거미가 무진장 많았던 외할머니댁에서 반년을 지내며 통역 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해지자 일곱 살의 꼬마 아이는 집안일을 거들어야 했었다. 그래 봐야 리어카를 끌고 골짜기에다 쓰레기를 버리러 다녀오는 수준이었지만 새벽길에 다녀오는 들길의 풍경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는 기억이 나기도 하고, 막 동이 터오던 잿빛의 골짜기를 가득 메우다시피 한 쓰레기더미를 보며 나름 신기해하던 기억이 나기도 한다. 그리고 큰 이모님이 말씀하시던 “비 오는 날이면 여기저기서 흙이 무너지며 인골이 삐져나오기도 한다”는 말에 조금 겁이 나기도 했었다.

어머니 역시 어린 시절 새어머니에게 책과 가방을 빼앗기고 지칠 정도로 힘든 밭일과 온갖 잡일들과 함께 새벽마다 그곳에 쓰레기를 버리러 다녔다고 했다. 어두컴컴한 새벽길에 바람까지 부는 날이면 파랗고 시뻘건 도깨비불이 여기저기서 떠돌아다니고는 했다는데, 머리가 어느 정도 컸을 때 들은 얘긴지라 빨간 인광이 어디에 있냐고 반문하기는 했지만 계속 이어지는 귀신 이야기에 그만 하찮은 의문 따위는 금세 지워버리고 귀를 기울이고는 했었다.

그 시절 제주에는 귀신이 그리도 많았다고 한다. 해뜨기 전에 일어나 자정이 다 돼서야 일이 끝나던 어머니는 거의 이틀에 한 번꼴로 귀신을 보았다고 한다. 그중 가장 많이 보았던 게 우물가에 서서 우물 속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하던 머리를 풀어 헤친 소복 입은 아낙의 모습이었다고 했다. 한때는 거의 매일 보다시피 해서 무서움이 사그라지겠거니 생각하기도 했었다는 데 웬걸 볼 때마다 그 무서움은 가시지가 않았다고 한다. 밭길에서 십여 미터를 떨어진 밭 한가운데 있던 커다란 버드나무와 그 바로 아래 있던 깊고 깊은 우물을 하염없이 내려보고 있던 그녀는 어느 날 밭일을 끝내고 돌아가던 어머니를 처음으로 바라보았다고 했다. 긴 머리에 너무나 창백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의 묘사를 듣다 무섭지 않았냐는 내 말에 그저 도망쳐 왔다고만 하시고는 이내 다른 귀신 이야기로 넘어갔는데, 제주에는 큰길에 자리 잡고 행인을 노리는 귀신이 있다고 한다.

긴 팔과 긴 다리를 가지고 돌담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는 멋모르고 자신의 가랑이 사이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죽인다는 이 귀신을 어머니께서도 몇 번 보신 적이 있다 하신다. 언제나 그렇듯 밤늦게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저 앞 돌담 위로 뭔가가 기다란 걸 뻗치고 있는 것이 보이기에 혹시나 싶어 멀찍이 서서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 귀신이었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면 죽을 테니 멀찍이 둘러서 집으로 가셨다고 괴담의 끝을 맺으시고는 했었다.

그 당시에는 참 신기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고, 재미있기도 한, 그런 이야기였건만 지금에서야 돌이켜보면 너무도 소름 끼치고 또 슬픈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사람과 이웃들과 형제들이 죽어 나가고서야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 비가 오면 어디 묻혔는지도 몰랐던 사람들이 백골이 되어서야 흘러나오는 이야기, 그 사람들의 한 맺힌 넋이 구천을 떠돌 때 그리도 시뻘건 인광으로 번뜩였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 이미 죽었을 내 가족이 혹시나 우물에 빠져있지는 않을까 해서 죽은 뒤에도 우물만 바라보고 있을 어느 여인네랄지, 마주치면 죽어야 했던 그 시절에 살아남기 위해서 피해야 했던 공포가 여전히 가슴 언저리에 자리 잡아 그런 사람 잡는 귀신을 만들어 냈던 것은 아닌지. 그래서 ‘귀신 잡는 해병’이 거의 대부분 제주 출신이었던 것처럼 기왕지사 죽을 거 내 의지로나마 죽자는 생각이 그런 서글픈 귀신들을 만들어냈던 건 아닌지 하는 생각들.

글의 서두로 꺼낸 첫 단락은 소름 끼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슬펐던 귀신 이야기를 하시던 어머니께서 마지막으로 기억하시는 외할머니의 모습이고, 어머니는 이 땅이 한번 뒤집어지던 그 시절에 제주를 영영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전체 4

  • 2021-04-04 10:46

    안타까운 재난으로 인해 많은 생명들이 동시에 목숨을 잃게 되면
    그곳에는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일이 발생하는게 어쩌면 당연하지 않나..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것이 귀신의 출현이 되던 혹은 인간의 이해 범주를 벗어나는 일이 되었던 간에
    하나의 장소에서 비 정상적인 큰 사고가 발생하고 그 사고로 인해
    정상적인 사이클이 깨어지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 2021-04-04 20:06

      비극이 벌어진 장소가 두려움을 몰고 온다는 것, 참 슬픈 현실입니다.


  • 2021-04-05 10:04

    최초로 참석하셨군요 몰랐던 사실이네요..


    • 2021-04-05 22:38

      아, 글을 잘못 썼네요. 문재인 대통령께서는 3번째이고, 군경 최고책임자와 함께 참석하신 건 처음입니다. 내용은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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