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 조선의 가톨릭교도에 대한 박해로 잡혀간 정약전은 동생 정약용과 함께 배교를 내세워 참수 대신 유배형을 받게 된다. 때는 순조 원년이다. 바로 직전 정약전은 정조에게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비록 영화 속 이야기로 가공된 것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정조의 총애를 받던 남인 세력을 몰락을 떠올리게 된다. 정약전의 동생인 정약용은 남인계 대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제 정약전은 우이도를 거쳐 흑산도로 떠나고,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떠난다. 강진은 육지다. 그러나 흑산도는 신안군에서도 당시의 뱃길로 며칠이나 걸리는 오지다. 영화 속에서 노론 세력의 거두가 말하는 것처럼 정약전을 더 위험하게 보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처럼 영화 [자산어보]의 도입부는 이 영화의 분위기를 정치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처럼 그리고 있다. 물론 이 정치 드라마는 중요한 틀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제목은 “자산어보”다. 쉽게 말하자면 ‘해양 생물 백과사전’이다. 이 영화를 만든 이준익 감독은 왜 ‘자산어보’의 제작 과정을 영화로 만들었을까? 물론 만들어지고 공개된 영화를 해석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그러나 [자산어보]는 정약전과 정약용이라는 실존 인물의 삶을 그리는 역사극일뿐더러 『자산어보』라는 실제로 존재하는 책을 만드는 과정을 영화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그러므로 우선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가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자산어보』의 원전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의 필사본이 몇 권 전해지고 있다. 우선 정약전이 쓴 서문을 살펴보자(번역은 ‘서해문집’ 판을 인용했다). “자산玆山은 흑산黑山이다. 나는 흑산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데, 흑산이라는 이름이 어두운 느낌을 주어서 무서웠다.” ‘자산’이라는 표현을 먼저 쓴 것은 정약용이고, 무서운 느낌이 덜한 이 이름을 정약전이 받아들여 책의 제목을 『자산어보』라 짓는다. 그런 다음 책을 짓는 데 도움을 준 이를 밝히고 있다. “섬 안에 덕순 장창대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면서 독실하게 옛 서적을 좋아했다…자연물을 모두 세밀하게 살펴보고 집중해서 깊이 생각해 이들의 성질과 이치를 파악했기 때문에 그의 말은 신뢰할 만했다.” 장창대라는 인물이 신뢰할 만한 조력자라는 말로, 이는 영화 [자산어보]의 내용과도 꼭 들어맞는다.

오늘날 전해지는 『자산어보』는 정약전 혼자만의 책은 아니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자산어보』의 공저자는 정약용의 제자인 ‘이청’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정약전이 분류한 해양 생물의 전거를 각종 고전 속에서 찾아낸 다음 이를 책 속에 기록하고, 또 몇 가지 해양 생물을 추가로 기록했다. 이로써 『자산어보』는 단순히 정약전이 이러저러한 해양 생물이 있다고 주장하는 책이 아닌 엄밀한 문헌 고증을 거친 학술 서적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청이 『자산어보』를 정리한 것은 정약전의 사후로 추정하고 있고, 만약 영화 속에서 이청의 역할을 다뤘다면 영화 내용이 산만해졌을 것이다. 대신 영화 [자산어보]는 정약전과 그의 조력자인 장창대의 우정을 다룬다.

유학을 공부하는 창대는 정약전을 처음 봤을 때 그의 죄명인 사학(성리학과는 다른 사악한 학문)을 익힌 죄를 듣고는 정약전을 멀리한다. 그러나 혼자 익히는 학문은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때마침 정약전 역시 흑산도의 해양 생물에 큰 관심을 두게 된다. 이를 계기로 정약전은 창대에게 글의 뜻을 더 깊게 가르쳐 주고, 창대는 정약전에게 해양 생물을 생태를 알려주는 거래를 맺게 된다. 바로 이 거래를 표방한 사제관계가 영화의 큰 줄기를 이룬다. 이제부터 창대의 학문은 점차 깊어지고, 정약전은 각종 해양 생물을 기록하는 책을 써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창대는 정약용의 제자가 가져온 책을 보고는 깊은 의문을 품게 된다.

창대가 정약전에게 묻는다. ‘선생님은 왜 세상을 살피는 책은 쓰지 않고, 이런 물고기에 관한 책을 쓰십니까?’ 정약전은 ‘생물의 생태를 자세히 기록해서 누구나 그걸 이용해서 잘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이 말은 『자산어보』의 서문을 마무리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창대는 점차 정약용의 학문에 이끌리고, 이를 보는 정약전은 창대가 벼슬에만 뜻이 있다고 오해한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이 시작되기 전에 정약전이 쓰는 자세하고 알기 쉬운 글과는 대비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창대는 새로 익히는 글에서 뜻을 파악하기 어려운 단어 하나를 정약전에게 묻는다. 그러자 정약전은 그 한 단어가 얼마나 많은 뜻으로 해석되는가를 알려주고, 여기에 감동한 창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창대의 감동과는 별개로 이 장면은 추상적 언어를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난해한가를 드러낸다. 같은 철학자일지라도 칸트가 쓰는 ‘오성’과 데이비드 흄이 사용하는 ‘오성’은 그 의미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특수하게 개념화된 언어는 그 지식을 소비하는 그룹을 벗어나면 알기 어렵기 마련이다. 그런데 공자 이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논어』조차 공자의 제자들이 정리한 책이다) 수없이 많은 해석과 분석을 거친 유학의 난해함은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 하진 않다. 그러니 지식 그룹의 언어를 익히지 않은 이들은 글을 알더라도 이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게 된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창대의 이 에피소드이고, 정약전은 글만 알면 누구나 이를 이용할 수 있도록 『자산어보』를 씀으로써 정약용의 『목민심서』와 대비를 이루게 한다.

이와 함께 영화 [자산어보]는 정약전의 『자산어보』 내용을 꽤 정확하게 재현하고 있다. 특히 흑백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 속에서 인상적인 컬러 장면을 보여준 ‘파랑새’ 장면은 단순히 어떤 상징이기 이전에 정약전이 창대의 말을 인용하면서 ‘말똥성게’를 설명한 내용을 그대로 영상화한 장면이다. 특히 파랑새는 ‘피조개’를 설명하는 내용에서도 피조개가 청익작(날개가 파란 참새)이 된다는 등 참새와 조개를 연결짓는 민간 설화를 여러 곳에 싣고 있다. 또한, 영화에서 『자산어보』의 내용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갑오징어’를 설명한 부분 가운데 먹물의 사용 방법을 비중 있게 영상화하고 있다. 먹물은 먹 대용으로 쓸 수 있으나 오래 지나면 글이 사라진다는 내용이니 기록에는 부적당하다는 내용이다.

[자산어보]는 이처럼 실제 기록된 내용을 중심 삼아 여러 가지 이야기를 전개한다. 자산의 ‘자玆’는 검다는 뜻이지만, 흑黑처럼 칠흑같은 어둠은 아니다. 그렇기에 여기서 ‘자’는 당장의 어두운 현실을 드러낸다. 그런 다음 이준익 감독은 창대가 ‘나팔고둥’을 설명하는 내용을 담아낸다. 『자산어보』에서 창대는 나팔고둥을 설명하면서 “이것이…소리를 내면 2~3리 밖에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창대가 나팔고둥을 귀에 대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담아낸다. 어두운 현실에 언젠간 들려올 희망의 소식인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후반에 이르면 창대는 조선 후기에 펼쳐지는 잔인한 시대의 풍경을 보게 된다. 그건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사회 구조의 절망적인 붕괴다.

이준익 감독은 영화 [자산어보]에 여러 가지 해석의 층위를 담아 놓는다. 우선 정조 이후 등장하는 순조와 수렴청정의 시기라는 정치 드라마가 있다. 그리고 가톨릭교도 박해라는 신유사옥의 시대적 풍경을 그리고 있으며, 이는 권력의 무자비한 탄압과 연결되어 억압받는 백성과 무자비한 탐관오리의 행태를 그려 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약전과 창대의 우정을 통해 그려내는 학문의 방법과 기록의 중요성이라고 볼 수 있다. 정약전은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상하 위계를 구분하지 않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평민인 창대에게 하나하나 꼼꼼하게 질문하는 태도를 보여줄뿐더러 해양 생물을 직접 해부하고 뜯어 보는 데 거리낌이 없다. 그런 다음 그것을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문장(이를 상어常語라 한다)으로 기록한다. 어떤 기록을 특정 집단만 이용하게 되면 권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오늘날 한국 사회의 언론이 지녀야 할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속에서 정약용은 추상적 개념어로 구성된 책을 쓰는 반면에 정약전은 구체적이고 알기 쉬운 언어로 된 책을 쓴다. 이는 마치 대립하는 두 학문적 태도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동반자 관계에 더 가깝다. 구체적이고 쉬운 언어는 세상을 명확하게 볼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런데 명확한 태도는 모든 것을 계산하기만 하는 계량적 태도로 이어지기 쉽다. 그렇기에 개념과 추상이 필요해진다. 어떤 사건을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파악한 다음 그것이 어떤 의도와 의미를 가지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개념적 추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가지 태도를 동시에 지니고 거짓과 사심 없이 사건을 알기 쉽게 정리하는 것이 바로 올바른 기록이다.

[자산어보]는 역사적 사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역사적 사건을 영화로 만드는 것은 꽤 위험한 일이다. 이는 역사를 잘못 해석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잘못된 가치를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행위는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일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래에 쌓아 올릴 가치와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준익 감독은 이전에도 역사적 사실을 최대한 존중하는 방식으로 [동주]와 [박열] 같은 영화를 만들어 왔다. 이번 [자산어보] 역시 역사적 사실을 가급적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창작한 작품으로, 특히 『자산어보』의 학술적 내용을 아름다운 영상으로 담아낸다. 더불어 영화 [자산어보]는 흑백의 명암을 통해 밝은 빛을 말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2 댓글

  1. “구체적이고 쉬운 언어는 세상을 명확하게 볼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런데 명확한 태도는 모든 것을 계산하기만 하는 계량적 태도로 이어지기 쉽다. 그렇기에 개념과 추상이 필요해진다. 어떤 사건을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파악한 다음 그것이 어떤 의도와 의미를 가지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개념적 추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가지 태도를 동시에 지니고 거짓과 사심 없이 사건을 알기 쉽게 정리하는 것이 바로 올바른 기록이다.”

    -명문 중의 명문입니다. 이땅의 모든 기자, 학자, 지식인들이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