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적 재난이 닥친 가운데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철수(박세종) 집에 어느 날 정체불명의 괴한들의 방문한다. 그들은 ‘대장’이라 부르는 자의 명령으로 철수의 동생 ‘순이(이다인)’를 잡아가러 온 자들이다. 어린 철수는 필사적으로 저항해 보지만, 괴한들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한다. 결국 철수는 살기 위해 순이를 잡아가는 데 동의한다. 조성희 감독의 단편 [남매의 집,2008]은 악마적인 기운-이들은 베엘제붑이라 불린다-에 지배당한 세계의 어느 한순간을 그리는 영화다. 그런 다음 조성희 감독은 전작의 상황을 더욱 밀어붙인 장편 데뷔작 [짐승의 끝,2009]을 만든다. 거의 모든 인간이 사라져버린 세계에서 임신한 몸을 홀로 이끌고 어머니를 찾아가는 순영(이민지)은 짐승과 신 사이에서 온갖 고난을 맞이하게 된다.
이 두 편의 영화는 모두 일종의 아포칼립스적 상황을 다룬 영화다. 세계는 망가졌고, 주인공은 망가진 세계의 온갖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된다. 철수와 순영은 친절한 태도의 인물이 순식간에 악마적 인물로 변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이는 세계를 대하는 감독의 냉소적인 태도일까? 어쩌면 감독은 우리의 현재를 아포칼립스적 상황으로 파악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조성희 감독은 다음 작품인 [늑대소년,2012]에서 냉소적인 태도는 남겨두되 낭만적 극복의 순간을 그려낸다. 물론 이 영화는 판타지다. 그러나 모든 판타지가 낭만적인 것은 아니다. [늑대소년]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철수(송중기)와 세상을 냉소적으로 대하는 순이(박보영)가 서로를 점차 이해하며 서로를 돌보는 이야기다. ‘미래를 떠올리며’ 몸과 마음을 돌보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후에 감독이 만들어낸 영화는 세계를 파괴하고 집어삼키려는 자들에 맞선 액션 활극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2015]이다.
조성희 감독이 만든 두 편의 영화인 [남매의 집]과 [짐승의 끝]은 명확하진 않으나 현재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다. 이 두 세계를 지배하는 건 일종의 신적인 혹은 악마적인 힘이다. 그러나 이 신/악마는 세계의 재난에 거의 개입하지 않는다. 세계는 그냥 정해진 것처럼 재난에 휩쓸려 버리고 주인공은 죽음 직전의 상황에 내몰린다. [짐승의 끝]에서 마치 신처럼 보이는 야구모자(박해일) 역시 정해진 상황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 그다음 만들어진 두 편의 영화인 [늑대소년]과 [탐정 홍길동]은 각각 한국 전쟁 이후와 1980년 전후의 어느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영화다. 비록 이 두 편의 영화가 각각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며 유명한 영화의 스타일과 서사를 차용했다 할지라도 두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은 비극적인 한국사/사회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네 편의 영화에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일종의 탐색이다. [남매의 집]은 불안을 다루는 영화다. 그 가운데 철수는 세계의 모든 가치가 사라져버린 이 순간에도 빨간펜 학습에 매진한다. 미래에 무엇이 있을지 알지 못하지만, 어쨌건 경쟁을 위한 준비를 해야만 한다는 건 우리 시대의 불안 때문이다. [짐승의 끝]은 불안 다음에 도착하는 절망에 관한 영화다. 순영은 임신한 몸을 이끌고 홀로 세계에 나서지만, 그곳에서 마주치는 것은 대체로 본능만이 남은 짐승이거나 이기적인 신이다. [짐승의 끝]은 [남매의 집]에서 느낄 불쾌한 불안을 절망의 순간까지 더욱 밀고 나간 영화다. 불안과 절망의 순간들은 이 시대를 사는 약자들의 일반적인 감정 가운데 하나다.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이 두 편을 통한 탐색 다음에 오는 것은 과거를 되짚어 보는 것이다. 현재를 더욱 또렷이 볼 수 있는 방법은 역사의 탐색이므로 [늑대소년]과 [탐정 홍길동]은 각각 과거의 어느 한 시점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진행해 나간다.
[늑대소년]과 [탐정 홍길동]은 본격적인 판타지 영화다. 과거를 다루되 있을 리가 없는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은 이야기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장치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바람이기도 하다. 타란티노 역시 히틀러 암살에 성공하는 이야기와 맨슨 패밀리의 실패를 그려내기도 했다. 바람은 또한 기대이기도 하다. [남산의 부장들,2020]에서 김규평(이병헌)이 다른 방향으로 차를 몰았더라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는 것들이 바람과 기대를 동시에 보여주기도 한다. 역사를 되짚을 때 가장 많이 떠올리게 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바람의 순간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쨌건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늑대소년]과 [탐정 홍길동] 사이에는 우리가 21세기에 겪은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 있다. 어쩌면 한국 사회는 2014년 4월 16일에 멈춰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위로해야 하고, 위로받아야 할 영혼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성희 감독의 네 번째 장편 영화인 [승리호,2020]는 전작이 다루던 과거에서 현재를 넘어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다. 그리고 미래야말로 현재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그런데 왜 “승리호”일까? 영화 속에서 업동이(유해진)는 승리호라는 이름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때는 뭐든지 이기면 좋은 줄 알았지” 승리호라는 이름은 부정과 긍정이 동시에 담긴 이름이다. [남매의 집]에서 어린 철수를 경쟁 사회로 내몰았던 불안과 [탐정 홍길동]에서 미친 아버지의 세계를 박살 냈던 길동이의 승리가 동시에 담긴 이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승리를 해야 하냐는 질문이 [승리호]에 담긴 내용이 될 것이다. 그런 다음 [승리호]는 꽃님이/도로시(박예린)를 통해서 [오즈의 마법사]의 모티브를 끌어들인다. [오즈의 마법사]는 재난에 휩쓸린 소녀를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려보내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결말에서 도로시는 자신을 도와준 이들이 실은 자신 주위의 평범한 사람들임을 깨닫는다.
물론 [승리호]는 [오즈의 마법사]와 같진 않다. [승리호]에서 오즈에 대응하는 인물은 장선장(김태리)이다. 그녀는 [승리호] 세계의 수많은 기술을 만든 기술자지만, 지배 권력에 대항해서 그 세계로부터 퉁겨져 나온 인물이다. 추락한 기계장치의 신은 평범한 인간보다 더 못한 인간으로 전락하는 법이다. 게다가 여기엔 착한 마녀도 없다. [승리호]에서 오즈를 지배하는 건 평범하며 선량한 기술자 오즈가 아니라 이기적인 권력자이자 기술 탈취자 설리반(리차드 아미티지)이다. 이는 [승리호]가 순수한 판타지의 세계를 다루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 세계를 토대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선장과 함께 이기적인 것처럼 보였던(허수아비) 김태호(송중기)가 실은 재난으로 아이를 잃은 아버지이며, 겁쟁이 사자 대신 용맹하며 자상한 타이거 박(진선규)과 진실한 인간의 마음을 지닌(양철 나무꾼) 업동이가 [승리호] 세계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승리호]의 선원들은 이 미래 세계에서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다. [승리호]의 세계에서 특별한 사람들은 설리반의 호의를 입은 사람들이다. 권력의 특혜를 입어 평온 무사한 삶을 살며 평범한 사람들의 삶 자체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바로 특별한 사람이다. 그러나 영화는 평범한 사람들의 개개인 속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들인지를 묘사한다. 단지 승리호의 선원만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우주 쓰레기를 치우는 저 수많은 인물과 검은 여우단을 구성하는 또 다른 인물들이 그들이다. 바로 이 평범하지만, 특별한 존재들이 힘을 합칠 때 우리의 세계를 구할 수 있다는 어떤 바람을 [승리호]는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라는 ‘승리’는 어떤 존재의 승리가 아니라 우리 시대, 평범한 우리들의 승리를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권력 따위에 기대거나 읍소하지 않는 평범한 우리들의 연대와 투쟁이 될 것이다.
[승리호]는 세월호의 비극 이후의 세계를 다루는 영화이다. 여기서 태호의 딸 이름이 ‘순이’라는 건 일종의 상징이다. 순이는 [남매의 집]에서 괴한들에게 잡혀가는 순이이면서 동시에 [늑대소년]에서 괴물 취급받던 철수와 공감을 쌓아가며 서로의 이해를 넓혀가던 순이이기도 하다. 순이는 현기영 선생이 단편소설로 담아낸 비극의 대표적인 이름이면서 문학과 대중가요 등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가장 친근한 이름이므로 일종의 대표성을 띤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승리호]에서는 2014년 4월 16일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다. 이는 그러한 비극을 다시는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한다는 요청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승리호]의 평범한 인물들은 목숨을 걸고 꽃님이를 지키려고 하며, 그들 주위의 평범한 이들에게 연대를 구하는 것이다.
[승리호]를 이야기하기 위해 “비극에서 연대와 투쟁으로”라는 거창하고도 정치 운동스러운 제목을 단 것은 조성희 감독의 영화 세계가 기본적으로 비극을 토대로 하기 때문이다. 비극은 기본적으로 알레고리의 문학이지만, 시대별로, 문화별로 그 형식과 서사를 달리한다. 전통적인 한국 사회의 비극은 “해결되지 않은 감정”을 기본으로 하는 “한”이다. 이에 반해 고대 그리스 비극이 그리는 것은 폴리스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한계와 이성, 곧 정치 드라마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한 것이 중세에 이르러 펼쳐지는 비극은 인간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세계의 필연인 허무의 장을 내세운다. 이러한 것들이 오늘날에 이르면 이 모든 부분을 거칠게 뭉쳐 작가의 관심사에 따라 중요한 부분이 도드라지는 모양을 취한다. [승리호]에서 다루는 비극은 한과 정치의 결합에 있으나 중세 세계를 그려낸 허무의 장은 그려내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바라는 기대가 [승리호]라는 미래에 투영되기 때문이다.
[승리호]의 영화적 완성도는 뛰어나다고 하긴 어렵다. 그러나 조성희 감독의 모든 작품들은 판타지이면서 동시에 오늘을 사는 우리 사회를 다시금 되짚어 보려는 시도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들이 [승리호]에 이르러 첫 번째 종합을 이룬 것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승리호]는 아이를 잃은 사람들이 비극의 순간에 아이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영화에서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가장 큰 비극과 그것을 더는 지켜보지 않겠다는 결단 또한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