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자 켈빈은 오래전 죽은 아내 하리를 솔라리스에서 만난다. 이것은 불가능한 사태다. 그러므로 켈빈은 하리의 형상을 한 그것을 로켓에 태워 솔라리스 밖으로 보내 버린다. 그렇게 지쳐 잠든 켈빈 앞에 또 하나의 하리가 나타난다. 이것은 마치 프로이트의 고전적 테마인 ‘억압된 것의 귀환’과 같다. 우리는 늘 타자에 대한 공포에 짓눌려 있으나 그 타자는 외부가 아닌 바로 나의 내부로부터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는 1972년 영화이므로 당시에 이것은 고전적 주제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솔라리스]가 타자의 공포를 다룬 영화인 것은 아니다.

원작자인 스타니스와프 렘이 <솔라리스>에서 제시한 비전은 조금 다른 것이다. 렘은 <솔라리스>의 러시아판 서문에서 ‘상호 이해가 성립하지 않는 존재와의 만남’을 그리려 했다고 말한다. 물론 이것이 주제는 아니다. 렘은 스나우트의 입을 통해 어떤 주제를 제시한다. “설령 실제로 실행에 옮긴 일은 없더라도 그런 비겁한 짓을 생각한 적조차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책 p107)” 이것은 칸트 윤리체계에 속하는 의문이다. 그런 다음 하리가 사라진 이후 켈빈은 스나우트에게 “불완전한 신”에 관해 말한다. 그러므로 렘이 제시한 비전은 일종의 과정신정론과 같은 불완전한 신에 관한 질문을 확장한 것에 가깝다. 과연 이러한 신에 의해 존재하는 인간에게서 기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쩌면 후회의 지옥일 수도, 반성을 통한 가치의 재창조일 수도 있다. 타르코프스키는 이러한 렘의 비전 대신 더욱 전통적인 주제로 향한다. 그것은 존재에 관한 문제이다.

오래된 주제는 그것의 진부함 때문에 사태의 해결 불가능성을 더 강조한다. 메리 셸리가 최초의 SF 작품인 <프랑켄슈타인>을 통해 계몽주의의 언어로 계몽주의를 공격했을 때 그것은 탐구 가능한 진리의 확신에 대한 공격이었다. 계몽주의 시대는 세 가지 명제를 통해 정의할 수 있다. 진리의 필연성, 진리의 확실성 그리고 진리의 명징성이다. 그러나 메리 셸리는 피조물의 입을 통해 진리에 대한 확신이 불러온 것이 바로 광기라고 차분하게 말한다. 우리는 아직 존재 자체도 정의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이 이야기를 영화의 시간에 맞게 간추린 제임스 웨일의 [프랑켄슈타인]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존재는 정의(올바름)와 함께 서구 철학사를 지배한 문제지만 그 누구도 답을 내리지 못한 문제다.

타르코프스키는 [솔라리스]에서 원작과 달리 영화의 전반부를 지구에서의 삶을 비추는 데 할애한다. 그곳은 연못에 둘러싸인 공간이다. 물은 인간의 심상을 반영하는 거울인 동시에 무엇인가 비밀이 숨겨진 심연이기도 하다. 지구에서의 켈빈은 남겨진 아내의 이미지를 불태우면서 자신의 존재가 독립적임을 선언한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바다로 구성된 행성 솔라리스는 인간의 외부를 지배하는 상을 모방하면서 동시에 내부에 웅크린 채 의식을 지배하는 상까지 모방한다. 켈빈에게 있어 그러한 심층 의식 속 모방의 대상이 바로 하리였던 것이고, 솔라리스 연구자인 스나우트와 사토리우스에게는 그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각각의 상이 보내졌지만, 원작만이 아니라 영화 또한 하리라는 존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하리의 육체는 원자가 아닌 중성미자로 구성되어 있다. 유기체의 기본 구성을 배반하는 존재인 동시에 인간의 의식을 확장하게 하는 대상인 것이다. 이러한 하리는 켈빈에게 있어 타자인 동시에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기억의 씨앗을 통해 발현한 존재인 하리는 억압된 것이 귀환한 타자이면서 켈빈이 늘 그리워했던 대상이기도 하다. 이 양가적 의식으로부터 생겨난 하나의 존재라는 이 기묘한 인물이야말로 이사야 벌린이 낭만주의를 정리하면서 제시한 주장 “만물에 불변의 구조가 있다는 개념을 파괴하고 전복하려는 시도”에 걸맞은 그러한 인물이다. 바로 이 지점 이후로 주어지는 것이 존재의 불안을 자극하는 고통과 회의다.

“당신은 재생된 것뿐이야. 형태의 기계적 재생, 매트릭스의 복제야!” 사토리우스의 이러한 주장에 하리는 격정적으로 반응한다. “난 인간이야!” 이 익숙한 반응은 이후에 질문의 형태를 거쳐 늘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다. 리들리 스콧은 1982년 작 [블레이드 러너]를 통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이후 이를 이어받은 드니 빌뇌브는 2017년 [블레이드 러너 2049]를 통해 ‘무엇이 인간인가’를 질문한다. 리들리 스콧이 인간의 조건을 제시한 다음 드니 빌뇌브는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행위를 해야 하는가를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질문 모두 사진과 기억을 중심 키워드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인간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동물이다. 회화는 불안의 산물이다. 최초의 그림은 사냥 전 모의 사냥을 통해 불안을 해소한다는 측면만이 아니라 죽은 동물에게 복수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제의 형식이다. 회화는 회의의 산물이다. 의심스러운 신을 그림으로 표상하고, 확실치 않은 나의 기억과 위상을 화폭에 고정하는 행위다. 사진은 존재의 증명이다. 불안정한 기억의 확신을 필름에 세기는 행위는 나의 존재를 증명한다. 하지만 그것은 관계 속에서만 확실성을 가질 수 있다. 덩컨 존스의 2009년 영화 [더 문]은 존재 증명에 있어 관계없는 관계의 비극을 그리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나’는 복수로 존재하지만, 그로 인해 나의 존재가 부정된다.

자신은 인간이라는 하리의 반응은 결국 기억이 아닌 켈빈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솔라리스의 바다에서 태어나고 솔라리스의 바다가 켈빈으로부터 뽑아낸 기억을 통해 의식을 부여받았을지라도 켈빈을 사랑하는 하리의 의식은 모방을 뚫고 새로이 자리 잡은 것이다. 와이츠 형제는 2002년 [어바웃 어 보이]에서 휴 그랜트의 입을 빌려 “인간은 섬이다”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것은 영국의 시인 존 던의 <인간은 섬이 아니다>를 긍정하기 위한 것이다. [솔라리스]의 마지막 장면에서 켈빈은 헬기를 타고 솔라리스의 바다에 생겨난 자신의 고향 집을 본다. 그것은 완벽한 섬이다. 그리고 단순한 기억의 재생이다. 그렇게 SF 영화 속에서 가장 기초적인 인간의 규정은 고립이 아닌 관계로부터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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