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모든 것』 곽철환 지음, 행성B잎새
『인간의 문제』 마르틴 부버 지음, 윤석빈 옮김, 도서출판 길

재즈 피아니스트 ‘조 가드너’. 그의 유일무이한 꿈은 ‘도로시아 윌리암스’와 함께 공연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때때로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행운을 낚아채듯 조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상태에서 도로시아와 공연 약속을 맺게 된다. 조는 마치 꿈길을 헤매듯 뉴욕의 복잡한 길을 걷다 뚜껑이 열린 맨홀에 빠져 영원한 꿈속으로 날려져 버린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빛을 향하는 세계다. 서구 문화에서 빛은 인간의 근원이지만 조는 그런 것보다 드디어 움켜쥐었다고 생각한 꿈을 놓쳐버린 것을 도저히 견디지 못한다. 조에게 삶의 목적이자 빛은 바로 도로시아와의 협연이었다.

’22’는 모두가 머나먼 지구로의 여행을 준비하는 ‘유 세미나’에서 가장 오래 남겨진 영혼이다. 남아있지 않고 남겨졌다는 것은 22에게 그 어떤 ‘불꽃(혹은 삶의 목적)’도 없다는 것이다. 수십억의 영혼이 지구로 향하는 불꽃을 찾는 동안 22에게 남겨진 것은 자신에게 불꽃이 없다는 불안이었고, 22는 이 불안을 온갖 허세와 무시로 덮어놓은 참이다. 그런 22가 오로지 단 하나의 불꽃에만 목을 매는 조와 만나게 된다. 22는 자신의 불안을 영원히 덮어놓을 수 있는 유 세미나에 남겨질 기회이고, 조에게는 다시 지구로의 통행권을 획득해서 자신의 육신을 되찾을 기회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이 두 영혼은 갑작스럽게 지구로 떨어지고 22는 조의 몸에, 조는 고양이의 몸에 영혼이 자리 잡게 된다.

[소울]은 우리 모두 순간을 살아가지만, 그 순간의 연속이 삶이라는 소소한 진실을 상식적이고 감동적인 화법으로 그려낸 영화다. 잘못 선택된 몸에 자리 잡은 두 영혼은 일대 소동을 벌이며 뉴욕 거리를 헤맨다. 이 과정에서 22에게 그저 혼란과 공포로만 느껴졌던 인간 세계가 새로운 모습으로 점차 다가오게 된다. 피자의 맛을 느끼기도 하며, 조의 어린 제자의 모습에서 그녀의 불꽃을 보기도 하고, 거리의 가수가 부르는 노래에서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 멀리 떨어져 낯설고 두려운 대상이었던 인간 세계 속에서 부침을 거듭하는 순간 22의 영혼에 점차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지금 이 순간의 현상에 집중해서 그것을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알아차리고 그냥 지켜보기만 하는 것” 이것을 불교에서는 ‘알아차리기((ⓟsati))’라고 한다. 안다는 것은 내가 그 앎의 대상 자체가 되어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앎의 순간 속에서도 조는 여전히 자신의 놓쳐버린 꿈에 집착하는 중이다. 조는 고양이의 몸을 차지했다. 고양이의 몸에 밴 본능은 조의 의식에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하며, 때때로 본능이 의식을 지배하기도 한다. 고양이의 본능은 번뇌에서 일어나지 않을뿐더러 조의 마음은 꿈을 향한 탐욕과 몸을 잃은 분노 그리고 삶 자체를 응시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 번뇌(3독毒)에 빠진 상태다. 그러니 조는 22가 모으고 있는 수많은 잡동사니에 관심조차 주지 않는다. 이 수많은 잡동사니는 이미 픽사의 전작인 [월-E]에서 삶의 순간들을 빛나게 했던 물건들로 드러난 바 있다.

조의 의식이 전환을 맞이하는 것은 22 덕분이다. 22는 처음 맞이하는 조의 주변인들과 새로운 대화를 시작한다. 그동안 조가 주변인들과 하는 말은 대화라기보다 재즈의 열정에 휩싸인 조의 일방적 주장이었을 뿐이다. 22는 조의 제자가 하는 말을 충분히 들어준 다음 그녀의 불꽃을 새롭게 타오르게 하며, 이발사의 삶을 질문함으로써 그를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그런 다음 조는 어머니에게 자신이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말을 토해 놓음으로써 어머니의 진실한 마음을 전해 듣게 된다. 마르틴 부버는 ‘인간은 인간과 더불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현실을 피하거나 벗어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해야 하는 것”이며, “한 세계를 인식하는 인간은, 인간과 함께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대화’다.

대화는 나를 나이게 하는 요소이면서 동시에 대상의 이해를 요구하는 행위이다. 나와 대화를 하는 상대방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내 생각만을 얘기할 때 그것은 나 이외의 다른 세계를 거부하는 행위가 된다. 이처럼 경계짓는 행위를 불교에선 중생이 그은 최초의 경계라고 말한다. 22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22는 자신을 거쳐 간 수많은 영혼을 읊으며, 그들 모두가 자신의 불꽃을 찾아내는 데 실패했다고 말한다. 이는 실패가 아니라 22의 강고한 거부다. 나의 세계를 지키고, 알 수 없고 두려운 세계를 거부하겠다는 강한 거부. 여기서 22라는 이름(영혼의 숫자)을 ‘2’를 강조한 수로 읽는다면 또 다른 측면을 볼 수 있다(물론 피타고라스학파가 2를 최초의 수라고 주장한 것처럼 22를 최초의 영혼이자 2+2, 즉 4(피타고라스학파의 두 번째 수)를 예비하는 수라고 읽을 수도 있다). 2분법은 마음의 양면성이다. 좋고 싫음, 아름답고 추함, 귀함과 천함. 이 두 사태는 고정된 것이 아니므로 인간의 마음은 양쪽을 끊임없이 오락가락하고 이 불안정에서 나오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고통(苦)이다. 22에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 고통인 셈이다.

[소울]에서 또 하나 인상적인 공간은 몸과 영혼의 공간이다. 이곳은 마음의 소음에 먹혀버린 영혼들이 자리 잡은 공간이다. 마음의 소음은 집착이다. 마치 내가 생각하는 그것만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받아들인 상태, 그럴 때 인간은 번뇌에 사로잡혀 괴물이 되어 버린다. 이 공간에서 마음의 소음에 사로잡힌 이들을 구해주는 ‘문윈드’의 행위는 제법 흥미롭다. 그는 번뇌에 먹힌 이들에게 전혀 다른 소음을 들려줌으로써 그들의 집착이 별것 아님을 깨닫게 한다. 마음의 소음을 다른 소음으로 무마시키는 이 행위 역시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의 ‘틈’을 만드는 행위와 비슷하다. 불교에서 열반으로 나아가는 데 가장 큰 장애를 마음의 소음이라고 말하며, 마음이 작용할 때마다 잠시 틈을 가짐으로써 마음을 약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분명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울]에서 위기의 클라이맥스에서 찾아오는 것이다.

[소울]은 영혼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몸에 관한 영화다. 이는 조가 지닌 삶의 목적이 인간의 몸에서 비롯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 조의 몸을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영화 속 한 장면에서 조의 몸에 깃든 22는 무심히 날아온 씨앗 하나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 그건 삶에는 어떤 목적도 목표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다. 이는 22가 조의 몸에 들어서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깨달을 수 없는 사실이다. 22가 조의 몸으로 잠시 동안 만난 사람들, 심지어는 지하철에서 22에게 짜증을 내는 사람까지, 22는 그 모든 것에서 몸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어떤 느낌을 발견한다. 마르틴 부버는 “만남의 첫째 조건은 바로 몸이다. 몸은 결코 영혼의 감옥이 아니라 내면적 관계의 본질적인 조건”이라고 말한다. 대화를 하려면 서로 만나야 한다.

부버에 따르면 만남을 부정하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그 하나는 나를 상실한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나 자신에 집착하는 인간”이다. 첫째는 22이며, 둘째는 조를 떠올릴 수 있다. 22는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나를 상실할까 걱정하는 인물이며, 조는 타인을 무시하고 자신에게 함몰해 있는 인물이다. 이러한 22와 조가 하나의 육체를 공유하면서 삶의 순간에 느끼는 기쁨을 깨닫게 된다. 인간은 결국 더불어 사는 존재이며, 인간은 영혼의 집이 되고, 세계는 인간들이 함께 거주하는 집이 된다. 이 공통의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그들 사이에서 만남을 이루며 함께 살아간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소소한 관계를 맺고 그 순간의 기쁨을 느끼며 사는 것. 이는 [소울]이 말하는 사소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영화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영혼의 세계는 어떠한가. 그것은 전통적인 서양 종교의 세계와는 다른 듯하면서도 비슷한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말하길 인간은 빛에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이 말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 인간됨에 상관없이 빛을 향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제리들과 테리가 있다. 그들은 우주원리에 가까운 고차원의 존재들이다. 아직까지 인간은 알 수 없는 존재라는 말이지만 동시에 물리적 우주 법칙에 따른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다음 각각의 특성을 부여받는 영혼들이 있다. 영혼은 동서양 모든 종교에서 언급하는 것이지만, 영혼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다만, 역사상 영혼이란 무엇인가를 규정하고자 하는 수많은 시도만이 있었을 뿐이고, 이 가운데 종교와 상관없이 영혼을 규정하려 했던 가장 유명한 인물은 역시 아리스토텔레스다.

영혼에 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없지만 종교를 떠나서 아주 소소하게 정리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일정한 유전적 특성을 지니고 태어난다. 이를 선천적 획득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다음 태어난 인간은 삶을 살아가는 와중에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를 후천적 습득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선천적 획득과 후천적 습득을 한 몸에 지닌 인간은 이것들을 끊임없이 다시 되새기며, 추가하고 수정하며 살아간다. 이는 끊임없는 반성이다. 이처럼 3단계로 이루어진 영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끊임없는 반성이다. 반성은 없이 획득한 것과 습득한 것만을 내세우며 살아간다면 이를 아직까진 인간이라 보기 어려울 것이다.

4 댓글

  1. 보고 왔는데 왜 닥두님이 불교 철학을 얘기 하실만 한 영화였네요 ㅎㅎ

    죽음에서 생환해서 인생의 관점이 바뀐 사람중에는 이런 경험을 한사람도 있을것이다 라는 상상을 해서만든듯한 느낌ㅎㅎ

    단풍나무씨앗 날아오는 장면에서 속으로 ‘음~ 찰나의 인생’이랫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