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화의 주요 내용과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태인(유아인)과 창복(유재명)은 청소부다. 세상에는 다양한 청소부가 있으나 이 둘은 사람을 청소하며 살아간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시장』의 장총찬 같은 인물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소리도 없이]는 그와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이 둘은 어느 조직의 말단에서 시체 처리업을 맡아 비굴하게 생계를 유지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짐(사람)이 들어오면 그것을 손질하기 좋게 정리해 두고, 손질(살해)이 끝나면 지저분한 흔적이 남지 않도록 깨끗하게 청소하는 일을 한다. 그러나 그 수입은 그리 크지 않기에 그들은 생계를 위해 달걀을 판매하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소리도 없이]는 우선 조직의 최말단 노동자가 살아가는 이야기다.
시체 처리가 반복되는 일상이 이어지던 어느 날 태인과 창복에게 새로운 일거리가 주어진다. 조직의 실장은 초희(문승아)라는 한 소녀를 납치한 다음 몸값을 받을 때까지 유괴한 아이를 보호해 달라는 일을 이들에게 맡긴다. 창복에게 이는 비상사태를 의미했다. 그는 시체 처리의 전문가이지 신병 구속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복에겐 조직의 실장을 거스를 힘도 능력도 없다. 초희는 창복과 태인에게 떠넘겨지고 창복은 초희를 또다시 태인에게 떠넘긴다. 태인은 시골 한구석, 동생과 함께 살고 있는 지저분한 집으로 초희를 데려간다. 대체로 이러한 영화들에서 사건은 여기서부터 벌어지지만, [소리도 없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납치와 관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소리도 없이]는 이보다는 조금 더 근원적이며 신화적인 이야기를 담아낸 영화다.
[소리도 없이]에서 태인을 연기하는 유아인은 언어장애인이다. 그러므로 “소리도 없이”는 우선 영화의 상영 시간 내내 (알아듣기 힘든 단어 외에)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태인의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반면에 태인은 청각장애인이 아니다. 창복의 말을 들어보자. 태인이 말을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다음 약간 말을 얼버무리고는)목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어쩌면 태인이 어떤 충격 때문에 말을 잃었거나 말문을 닫아버린 것일 수도 있다. 우리로서는 태인이 실어증에 걸릴 만한 충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영화는 그러한 뉘앙스를 슬쩍 풍긴 다음 다른 이야기로 넘어간다. 상징적 의미에서 말문을 닫음은 나와 세계 사이의 단절이다. 혹은 “소음과 분노(『맥베스』)”에 대한 역설적 표현일 수도 있다.1 끔찍하고도 폭력적인 현실을 거부하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충격 혹은 분노 때문에 언어를 잃어버린 태인을 둘러싼 세계는 일종의 신화적 세계다. [소리도 없이]가 그려내는 시니컬하며 비판적인 블랙 코미디의 세계에서 직업인들은 자신의 직업에 아주 충실하며, 예의 바른 인물들이다. 창복은 조직의 실장만이 아니라 실장의 부하들과 인신매매 하부 조직 인물에게도 깍듯하게 예의를 차린다. 이쯤에서 우리는 소스타인 베블런이 『한가한 무리들』에서 했던 이야기 “예의범절은 신분의 표시이다”를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이들에 대비되는 조직의 실장이야말로 “교양있는 예절과 생활양식”을 갖춘 인물쯤 될 것이다. 그러니 [소리도 없이]에서 그리고 있는 직업인의 세계란 베블런의 “약탈문화 단계에서 노동이란 허약함 또는 지배자에 대한 복종을 의미하는 사고습관과 결부되는 것”이란 말이야말로 이 직업의 세계를 정확히 묘사한 말이다.
물론 이러한 예의는 창복만이 갖추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체화한 것이며 오직 태인만이 아주 가끔 이 ‘경계’를 넘나든다. 태인은 조직 실장을 일종의 대립자처럼 생각하는 동시에 선망하는 인물이다. 그는 실장이 죽는 순간 평소 눈독을 들이던 피에 절은 실장의 정장을 획득한다. 옷은 신분의 상징인 동시에 노예의 표지이기도 하다. 실장에 대한 반발은 자신이 노예 상태에 있음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며, 실장의 정장은 노예를 부리는 그보다 높은 노예로의 상승을 의미하지만 결국 노예 위의 노예일 뿐이다. 또다시 베블런의 말이다. “우리는 아직도 사실상의 노예 상태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노예 상태의 오명에 매우 민감하다.” 그러나 태인은 경계 내에서 부침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그 경계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일반적인 몸값 영화에서 경계선은 인간 사이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소리도 없이]의 경계선은 아주 독특하게도 ‘직업’에 있고, 이 지점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독창적인 지점이다. 영화 속 인물들을 살펴보자. 태인과 창복은 시체 처리라는 직업인에서 갑작스럽게 신병 구속이라는 업무 영역으로 넘어선다. 물론 이들에겐 이것이 비극의 시발점이다. 그런데 이 비극은 조직의 실장이 자신의 직업적 경계를 지속적으로 넘나들었기 때문이다. 태인과 창복이 실장에게 인질을 넘겨받은 다음 날 이들은 실장의 죽어가는 시체와 마주한다. 이유는 다른 일을 너무나 많이 벌였기 때문이다. 이제 인질과 몸값의 최초 권리를 소유한 실장이 죽음으로써 인질의 위치는 허공에 붕 떠버리고 만다. 그런 다음 만난 신병 구속 전문가들은 몸값을 받아내는 일을 창복에게 떠넘기게 된다. 여기서 창복은 시체 처리 업자에서 완전히 납치범으로 넘어서 버리고 만다.
이 외에도 사람의 죽음을 거래하는 신병 구속 전문가들이 생매장된 경찰을 구해내는 일이나, 원하는 상품(인간)이 아님에도 아이를 넘겨받는 장기매매범이 있다. 게다가 조두순을 떠올리게 하는 가장 끔찍한 인물로 보였던 인간이 실은 아주 진지한 경찰인 장면들을 통해 경계를 넘어서거나 경계를 흐리는 장면들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그러므로 우선 [소리도 없이]는 직업윤리를 다루는 영화로 볼 수 있다. 신체를 훼손하고, 사람을 죽이고, 장기를 팔아먹고, 아이를 납치하는 이 악몽 같은 직업의 세계에서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다. 이것은 우화의 세계다. 직업윤리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 맡은 임무를 묵묵히 성실하게 처리하는 것, 결코 반항하지 않는 것. 그러나 이것은 어디선가 많이 듣던 이야기다.
파괴 기계를 작동하던 인간들이 있었다. “공무원은 행정작업을 하고, 기업가는 돈을 벌고 군대는 전선을 지키고, 게토의 유대인은 생존에 힘쓰고, 독일과 독일 점령 지역의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지키고 있었다.”2 라울 힐베르크는 이를 “진부함(banal)”이라 표현했고, 이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한나 아랜트는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을 제시한 다음 이를 “무사유”로 해설했다. [소리도 없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유하지 않는 인간들이다. 그들은 직업 정신에 매우 투철하며, 자신의 일에는 고도의 전문성을 보여줬다. 신병 구속 전문가들의 그 꼼꼼함을 떠올려 보라. 그러나 그러한 전문성만을 신뢰하며, 붙들고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무사유적 진부함’이며, 이 진부함을 끝까지 밀어붙이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세상은 파괴 기계에 휩쓸린 후이다.
[소리도 없이]의 마지막 장면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태인은 진부한 세계에서 직업 원칙에 따라 휩쓸리는 와중에 순간순간 그 경계 너머를 보게 된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혹은 가장 현실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인 납치된 소녀와 태인의 동생이 뛰어노는 장면 그리고 이들과 창복이 함께 하는 장면이다. 아무런 사유 없는 진부한 세계가 단 하나의 감정으로 깨져나가는 순간을 우리는 테리 길리엄의 [여인의 음모 Brazil]에서 목격한 적이 있다. 태인 역시 감정이 전해지는 공간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경계 밖으로 마음이 이끌리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태인이 실장의 옷을 내버리는 순간은 명령과 순종으로 이루어진 직업의 세계에서 감정의 세계로 걸어 나오는 순간이다.
한편, 태인과 창복은 달걀 판매와 시체 처리라는 두 개의 직업을 가진 인물이다. 그러나 창복은 언젠가 태인에게 달걀 판매 차량을 넘겨줄 생각이다. 그런 다음 창복은 느닷없이 납치 업에 휩쓸려 들어간다. 여기서 달걀 판매는 현실적 직업이고, 시체 처리는 상징적 직업이다. 그러나 상징의 영역은 달걀 판매가 일정 부분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양복을 껍질 벗듯 벗어 버리는 태인의 모습에서 드러나듯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건 너무 손쉬운 해설이다. 그건 이 영화의 구조가 자못 이창독 감독의 [초록 물고기]를 닮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쩌면 [소리도 없이]는 『데미안』의 주인공인 에밀 싱클레어가 현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소년의 감성으로 재구성한 [초록 물고기]의 세계로 도피하는 이야기는 아닐까?
태인과 창복은 분명 유사 가족 관계로 보이지만, 영화 속에서는 그저 창복이 태인을 거둬 키웠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의 존재를 설명하지 않는 또 한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태인의 동생으로 설정된 이 소녀는 마치 버려진 것처럼 태인의 방에서 살아가고 있다. 창복과 태인과 그의 동생.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이상한 세계. 이 세계에서 창복은 태인에게 그다지 큰 간섭은 하지 않지만, 앞날을 걱정하는 표현을 하며(계란 장사를 물려줄 생각도 한다) 잠들기 전 늘 기도 테이프를 듣길 원한다. 이건 자신과 같은 성실하며 신실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일뿐더러 아버지의 태도이기도 하다. 이 지점까지 생각했을 때 우리는 [소리도 없이] 속에 구성된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볼 수도 있다. 그것은 바로 소년 태인이 자신을 어른으로 상상한 직업의 세계다.
영화 속에 구성된 세계는 우리가 알고 있으며, 인식하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다. 프로페셔널의 세계인 동시에 모두가 상대를 존중하려는 세계다. 더군다나 초희의 가사 능력은 놀라울 정도다. 이런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인이 된 우리는 세상이 얼마나 야비한지 차고 넘칠 정도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상상하는 어른의 세계란 [영웅본색]의 세계에 조금 더 가깝다. 어른들이 등장하며, 예의를 갖추고, 각자 특별하면서 독특한 직업이 있는 세계다. 그리고 이 세계는 아이를 둘러싼 세계가 팍팍할수록 더 강한 판타지를 띠게 마련이다. 이탈리아 철학자 프랑코 베라르디는 한국사회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 적이 있다. ‘끝없는 경쟁, 극단적 개인주의, 일상의 사막화, 생활 리듬의 초 가속화’3
한국사회를 규정하는 이 강도 높은 특징에 휘말린 아이는 차츰 사회와의 소통을 끊어버린 다음 내면의 세계로 깊이깊이 들어간다(바로 태인이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가 영화를 통해 보는 태인이 실은 초희와 같은 11살 소년일지도 모른다. 11살 소년이 몸만 커다랗게 자란 20대 청년이 되어 직업의 세계에서 괴로워하는 이야기. 그렇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창복을 따라 청소업을 한 태인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자신의 전문 직업에서도 어설픈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소리도 없이]는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읽을 수 있는 영화다. 그러니 [소리도 없이]에서 그려 보이는 세계를 소년이 상상한 세계인 동시에 태인이라는 인물이 한국 사회의 노동 신화의 허구를 점차 깨달아가는 우화적 신화라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소리도 없이]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진짜 직업의 세계를 다룬 다음 곧바로 판타지의 세계로 들어서는 이야기다. 그 판타지의 세계는 우리가 전쟁과 살육처럼 묘사하는 직업의 세계이고, 그 컨베이어 시스템과 같은 반성 없는 진부한 세계 속에서 세계가 부서지건 말건 나의 일만을 처리하려는 우리의 세계를 하나의 우화처럼 혹은 신화처럼 묘사하는 이야기다. 그러니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태인이 벗어 던진 옷은 더 나은 직업의 세계와 더 나은 노예의 세계를 꿈꾸던 한 인간이 그러한 망상을 깨트리고 현실로 벗어나는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태인이 옷을 벗어 던지는 순간 영화가 끝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소리도 없이]가 그려내는 세계는 태인을 둘러싼 세계이기 때문이다.
- 맥베스는 절망적인 상태에서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인생은 걸어다니는 그림자일 뿐. 불쌍한 연기자가/무대 위를 잰 체 활보하며 자신의 시간을 안달복달하는 것일 뿐./그러고는 더 이상 듣는 이 없는 것일 뿐. 그것은/백치가 들려주는 이야기.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찼으나./아무 의미도 없는.” 『맥베스』 김정환 번역, 아침이슬
-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라울 힐베르크, 김학이 옮김, 개마고원
-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203807
독특하고 재미있고 촬영,음악까지 좋더라구요.
요즘 아역들 분위기가 예전과 많이 다른듯 해요.
성인연기자 못지 않은 아우라와
유아인 유재명 배우님들 연기도 괜찮았고
농촌마을 풍광도 힐링이 될 정도로 예쁘더라구요.
무엇보다 예상을 벗어나 잔인하지 않아서 제일 좋았답니다!ㅎ
저 역시 두 배우의 연기가 무척 좋았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느낀 건 시골 버전의 [버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ㅎㅎ
두번째 보면서 유재명씨의 연기에 감탄을 했어요.
그동안 제가 과소평가했던거 같아요.
앞으로가 더 기대..한번 크게 터져주시길 ~
유재명 씨 연기 아주 좋았습니다.ㅎㅎ
‘존윅 세계관에다 별주부전이야기를 만들어봐라’ 해서 만든거 같은 신선하고 기이한 영화였습니다 농담도 지독한데 웃기고..
다음작품이 보고싶습니다 ㅋㅋ
네, 독특한 세계를 아주 매력적으로 그려냈네요. 저 역시 다음 작품이 궁금합니다.ㅎㅎ
좋은 글 잘 읽고갑니다~!
감사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