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린다고 했지만 눈이라고는 정말로 딱 두 조각이 살짝 떨어지는 걸 봤을 뿐이다. 펑펑 쏟아지는 눈을 봤으면 좋겠다. 에니스와 잭이 처음으로 폭력적인 섹스를 나누고(?) 양 한 마리는 코요테 혹은 늑대의 먹이로 따끈하게 사라졌다. 영화를 보는 내내 커트 보네거트의 인상적인 문구 ‘그렇게 가는 거지’가 떠올랐다. 매우 쓸쓸하게.

(아마도)서부 어느 한 귀퉁이에 붙어있을 브로크백에도 눈이 내렸다. 것도 무진장 많이, 예전에 강원도 산골에 살던 후배에게 들은 바로는 눈이 엄청 오는 날은 한 시간 정도의 간격으로 한번씩 문을 열어줘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날부터 눈에 갇힌 채로 그 많은 눈이 다 녹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어쨌거나 에니스와 잭은 운이 좋았다. 눈에 깔려 죽을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예전에 그냥 잠든 것처럼 죽는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눈 속에 파묻혀 그냥 잠든 채로 죽는다면 얼마나 아늑하고 포근하게 이따위 세상과 안녕 할 수 있을까. 비록 살아있는 이들에게는 아주 쓸쓸한 죽음으로 비춰질지라도.

브로크백과 황무지를 담아낸 화면들은 매우 아름다웠다. 산등선은 하늘에 콱 박혀있었고 그 아래로 마치 구더기 때 같은 양 때들이 이리저리 꼼지락거린다. 그것들은 인간의 옷이 되고 인간의 밥이 되고 지구를 죽여 가는 폐기물이 된다. 버팔로를 죽이던 인간들은 한 종을 말살했지만 버팔로를 키우는 인간들은 지구전체를 죽여 간다. 양들도 잠이 들기 위해 양 때의 수를 헤아릴까? 인간들은 울타리를 넘는 양의 수를 헤아리지만 양들에게는 사실 넘을 수 있는 울타리가 없다. 인간은 감히 넘을 수 없는 괴물이다.63년에 처음으로 만났던 잭과 에니스는 브로크백에서 1년 가까이를 지내고 4년 뒤에 다시 재회한다. 역사적인 순간. 그러나 에니스에게 그 역사의 소란스러움은 발로 차버리고 싶은 소음일 따름이다. 우리가 그 시절에 ‘성해방’을 소리 높여 외쳤을 때 아마도 수많은 마초들은 영화에 등장해서 떡치는 얘기만 하다가 에니스에게 혼쭐이 난 히피들과 똑같이 혹은 더 역겹게 봐라봤을 테다. 사실 지금도 은밀하고 성스러운 성을 주구장창 외고 사는 인간들로 지구의 대부분이 뒤덮여 있다.

에니스는 진짜로 나쁜 놈이다. 에니스가 알마에게 잭을 말하길 “잭은 텍사스 남자야”라고 말할 때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까발린 것이다. 그에게 알마는 단지 도구였고 자신의 생활을 유지시켜 주는 방패였다. 그의 기억 속에 각인된 어느 동성애 혐의자의 참극은 그 자신이 단지 게이에 ‘가까울지도 모르는’ 남성임에도 그 참극을 방지하기 위한 도구로 알마를 활용한다. 나쁜 놈. 에니스야 말로 진짜 텍사스 남자였고 그에게는 마초라는 말을 붙이기도 뭣하다. 태어나면서부터 게이였던 잭은 그런 에니스를 확실하게 사로잡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술과 섹스. 그리고 에니스와 같은 남성들은 불확실한 두려움에 집착한다. 에니스는 겁쟁이에 아주 이기적인, 불쌍한 놈이다.

대체로 세상은 매우 쓸쓸한 곳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관계에 엮여져 돌아가지만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회관계로부터 고립 당한다. 어떤 영화의 대사처럼 ‘인간은 고립된 섬’이다. 그 사회 속에서 잭은 자신의 성정체성에 따라 관계들을 엮으며 살다 어느 날 그냥 사라진다. 하지만 그저 되는대로 살아가는 에니스는 주변의 관계들을 파탄 내며 결국 황무지 한 켠에 자리를 잡는다. 아마도 잭의 성향을 알았을 잭의 부모가 그렇게 고립된 섬처럼 살아갔듯이 이도저도 아닌 에니스는 자기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에니스와 잭의 아버지는 ‘텍사스 남자’였고 그들의 상상력이란 대체로 무자비한 수준이다. 마지막 딸의 결혼식을 하객으로 참석하는 ‘아버지’ 에니스는 더는 아버지가 아니지만 마지막 남은 하나의 관계마저 끊어버릴 용기는 없다. 그러니까 사는 건 결국 그 쓸쓸함 혹은 결핍 따위들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