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테크의 소개문에서 멜빌은 “혁명의 해인 1917년에 태어나 독일의 파리 점령기에 레지스탕스로 활약”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비록 1917년이 중요한 해이긴 하나 멜빌의 영화를 이해하는 방점으로서는 20세기를 여는 전쟁의 와중에 태어났음을 강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선택일 듯하다. 그는 20세기를 알리는 가장 중요한 사건들—첫 번째 전쟁 이후의 세계, 대공황, 두 번째 전쟁, 6·8—을 시기별로 겪었으며 자신의 내부에서 천천히 숙성시킨 세계를 하나하나씩 영화로 내보였기 때문이다.

앞서 인용한 김성욱 평론가의 글에 따르면 그의 첫 영화가 《바다의 침묵》이 되었던 것은 도리 없는 선택으로 보인다. 그는 “레지스탕스로 활약”했으며, “영화조합이 그를 받아들여 주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독립 스튜디오를 세우고 영화를 만든다. 이때 선택한 ‘베르코르’의 소설 『바다의 침묵』은 적은 제작비로 영화촬영을 가능하게 함과 동시에 두 개의 저항, 즉 레지스탕스와 영화조합-저항의 경험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효과 또한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영화 《바다의 침묵》이 내세우는 것은 反나치 혹은 反전쟁이 아니라 구조적인 힘에 대한 ‘저항’이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겪은 끝없이 이어지는 참호전의 결과로 탄생한 동지애는 타인에 대해서는 한없이 배타적이었으며 이어지는 전쟁을 가능하게 하는 심리적 요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두 번의 전쟁을 선도한 독일 이전에 프랑스는 이미 삼색기의 ‘우애(동지애)’를 통해 사람들 속에 이를 박아두었던 것이다. 동지애, 곧 전우애는 적과의 대치를 토대로 작동하는바 철저히 배타적이며 ‘우리’를 제외한 모든 것에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멜빌은 이에 대한 질문을 두 편의 영화 《바다의 침묵》과 《그림자 군단》으로 제기한다.

두 편의 영화는 마치 연이어지는 한 편의 영화와도 같다. 1940년에 시작해 1941년에 끝나는 《바다의 침묵》에서 노인과 조카는 독일군 장군에 맞서 ‘침묵의 저항’을 수행한다. 한 존재를 철저히 무시함으로써 그를 존재하지 않게 하는 것이야말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저항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낭만적인’ 장교는 그의 존재를 끊임없이 일깨우고자 한다. 그는 프랑스의 정신이 사라지길 바라지 않으며 이에 대한 증거로 노인의 서가에 꽂혀있는 ‘세계문학 전집’을 제시한다. 자신이 읽었던 부분까지를 정확히 기억하는 작곡가이자 동시에 군인인 그는, 그러나 그 ‘세계문학’이 유럽 속에서도 고립된 쓸쓸한 세계인 독일의 작가 괴테가 만들어낸 용어임을 언급하진 않는다.

정신적인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 독일이라는 쓸쓸하고 고립된 세계를 품을 수 있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서 프랑스를 제시하면서도 최상급의 정신세계를 하나의 틀로 포괄한 괴테를 지목하는 대신 위대한 음악가인 바흐, 베토벤, 슈베르트, 모차르트를 독일의 대리자로 내세운 것은 그가 열정만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고전주의 음악의 완성자 바흐를 연주하면서도 그것의 완결된 구조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일으키는 감정의 고양만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움으로써 이를 증명한다. 이러한 열정에 대응하는 것이야말로 냉정한 침묵일 것이다.

《그림자 군단》은 1942년부터 1943년까지를 다룬다. 이미 세계는 황폐화되었고 사람들은 침묵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조직적인 저항이 등장한다. 멜빌이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삶에서도, 의식에서도 폐허가 된 세계를 차분하게 바라볼 것을 권했다면 이제 세계는 상품과 사람이 넘쳐나며 동시에 열정(6·8) 또한 넘쳐나는 세계이다. 여기서 영화는 과거로 돌아가 저 무겁고 칙칙한 세계를 다시금 돌아봄으로써 1969년 당시의 세계를 이해하고자 한다. 개인의 침묵과 저항이 조직화하였던 시대, 이를 돌이켜 봄으로써 이에 반하는 현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매우 가슴 아픈 기억을 다시금 끌어내는 행위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조직을 이끄는 주요 인물인 ‘필립 제르비에’는 그의 삶을 이끄는 기본적인 배경을 ‘뤽 자르디’의 저작에 기댄다. 영화에 등장하는 뤽 자르디의 저작들은 자연과학의 기본적인 저작들이다. 그는 불합리한 세계에 대한 저항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 합리적인 세계를 선택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는 극단적인 합리성 혹은 이기적 동지애가 남긴 것이 어쩌면 의미 없는 세계 속에서 오로지 한 개인이 자신에게만 의미 있는 희생은 아니었던지를 반문한다.

‘프랑소와’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펠릭스를 구하고자 게쉬타포에게 자진해서 잡혀 들어가지만 펠릭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행위의 의미는 오로지 그 자신에게만 남을 뿐이다. 오직 그만이 안다면 그 자신의 죽음과 함께 그 의미 또한 상실되고 말 것이다. 여기에 영화의 마지막 ‘마틸드’의 처형을 고하는 자르디의 주장과 제르비에의 수긍은 이전 ‘자르디를 가장 사랑하지만 내 목숨이 더 소중하다’는 제르비에의 독백과 상충한다. 마틸드가 죽임의 순간에 짓는 표정은 명백히 죽음을 맞이하려는 자의 표정이 아니라 매우 복잡한, 그러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표정을 복합적으로 표현한다.

《바다의 침묵》과 《그림자 군단》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과도한 열정과 냉혹한 합리 사이의 ‘무엇’을 살펴보고자 한다. 혹은 합리적인 세계의 열정이란 무엇인가. 세계의 변화 직후에 등장한 이 두 편의 영화는 비록 전쟁의 와중을 다루지만 반전(反戰)을 말하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어떤 조건들이 우리를 구조적으로 옭아매는가를 다루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세계를 위치 지우는 조건들과 그 조건들 속에서 규정되는 의식이 또 어떻게 과정 속에 표출되는가를 다룬다.

과도한 열정이 망쳐놓은 세계는 비단 유럽의 이야기만은 아니며 2007년 12월의 한국사회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오직 그(것)만이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 혹은 내가 바라고 믿는 것은 실로 도덕적일 것이라는 교조적인 믿음. 이렇듯 오로지 심리적 층위에서만 발생하는 열정의 작동은 극단적인 합리성과 마찬가지로 타인(타자)을 배제하게 마련이다. 냉정함이 합리성이 아니듯 열정(정념)이 힘이라는 생각 또한 ‘운동’ 중심의 한국사회를 만들어가는 오해이기도 하다. 우리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엔진의 시동을 끄고 잠시 침묵을 유지하며 나의 세계와 이전의 세계, 그리고 앞으로의 세계를 천천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