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허명은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밟고 선다.’

강호를 떠나 밭을 일구며 살아가던 ‘방강’이 다시 강호에 돌아오는 순간은 그 스스로 고백하듯이 끝없는 살육을 위해서 마련된다. 팔대도왕(八大刀王)이 등장하는 영화의 전반부는 단순히 사족. 팔대도왕에게 잡혀간 각 문파의 장로들을 구하기 위해 그의 아들들이 방강을 이야기 속으로 불러내고 이제 보는 이를 지치게 만들만큼의 학살이 펼쳐진다. 여기서 열아홉, 스무 살을 전후한 젊은 아들들은 잡혀간 늙은 아버지 대신 강력한 젊은 아버지를 대동하고 스스로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영화는 그야말로 살육을 위한 카니발, 젊고 아름다운 육체는 하나의 고깃덩어리로 추락하는 바로 그 순간을 위해 잠시 ‘반짝’ 빛나고 이후 그들의 시체가 겹겹이 놓인 산 위에 방강을 올려세운다. ‘獨臂刀王’

영화는 중반부터 이들을 어떻게 죽일 것인가만을 놓고 고심한다. 칼에 베이고, 찔리고, 뚫리고, 혹은 죽창으로 또는 총탄으로. 날카로운 것이라면 모두 이들 젊은 육체를 무참히 도륙하며 팔대도왕의 졸개들의 죽음은 그저 보여지는 반면에 젊은 아들들의 죽음의 순간 바로 그 부분만큼의 고귀하고 아름답게 찬미 된다. 여기에는 방강이 읊조리는 허명에 대한 자기반영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가장 아름다운 한 때를 육체와 정신에 각인시키고 하나의 명분을 향해 질주하는 젊은 청춘들의 육체에서 터져나간 피와 살점보다 더 황홀한 순간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준다. 장철이 그려내는 벌거벗은 육체의 찬가 혹은 카니발은 그 결말에서 죽기 직전인 팔대도왕의 두령을 그들의 아버지가 도륙하는데서 그 극에 달한다. 마치 마지막 남은 고기의 한 점까지 남김없이 소비하기라도 하듯이 죽어가는 반 송장을 둘러싸고 시체를 다져가는 이 늙은 아버지들의 모습은 빛나는 청춘을 단숨에 소비한 자에 대한 보상처럼 여겨진다.

여기서 방강이 허명을 떠올리며 ‘독비도왕’의 금패를 짓밟아 버리는 장면은 의미가 부여되었으되 큰 의미가 없다. 이미 오른팔이 잘려나가기 전부터 아웃사이더였던 방강은 늘 강호의 주변부에 머물렀으며 여전히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에게 허명은 사치조차도 되지 못한다. 대신 강호의 내부에서 언제고 펼쳐질 살육을 위해 빛나는 젊음을 잠시 동안만 반짝일 젊은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기로 작정한다. 《독비도》의 아들이 이제 그 자신을 시기하던 젊은이들의 아버지가 되는 순간! 그러나 상징적 아버지는 그리 오래가지 않으며 아들들이 아버지를 극복하기 직전 아버지는 아들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상징적 아들은 결코 생물학적 아들의 위치를 점유하지 못하며, 방강의 아들이 탄생하는 순간 이들은 카니발의 재물―고깃덩이로 전락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강이라는 희대의 살인마의 제물이 되기 직전까지의 이들은 정말로 반짝인다. 하나의 계획에 수명의 젊은 육체가 찢겨 나가고 팔대도왕의 좀비들에 맞서 수없이 많은 젊은 육체가 무너져도 정확히 그 순간만큼을 장철은 황홀하게 그려낸다. 하지만 ‘돌아온 외팔이’는 다시 떠나가고 젊은 육체는 모두 쓰러지고 늙은이들은 미친다. 어떤 ‘허명’이라는 이 모호함은, 그러니까 여전히 지금 세계를 뒤덮고 모두들 쓰러져 간다. 젊음에 대한 찬양은 많은 부분에서 진심이기보다는 어떤 목적이다.

2 댓글

  1. 아마도 저의 아버지께서 중국 무협 영화를 좋아하셨던 듯합니다.
    제가 코흘리개 때 부모님과 함께 외팔이 1편과 돌아온 외팔이를 영화관에서 봤거든요.
    특히 1편의 일부 장면들은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네요.

    요즘에는 고전 무협 영화들을 유튜브나 파일로 볼 수 있어서
    가끔 예전 추억을 되살리곤 하지요. ^^

    제가 본 60년대 무협 영화 중에서는 외팔이 1편이 단연 최고입니다.
    당시의 무협 영화 수준에서는 스토리가 매우 수준 높았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깡따위의 복수를 거쳐 이소룡에 안착할 때까지
    저도 꽤 많은 무협 영화를 봤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