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철학 수고』 칼 마르크스 지음 |강유원 옮김 | 「이론과 실천」

몇 년 전 모 게시판에서 ‘양극화’라는 말을 꺼냈다가 비웃음만 들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지금 그 게시판의 대부분의 이들은 매우 진지하게 ‘양극화’라는 말을 사용한다. 자신의 위치가 점점 불안해지고 하락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담 스미스는 자본을 “축적되고 저장된 일정량의 노동”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노동자에게 있어 “자신의 노동을 빌려준다는 것은 자신의 노예생활이 시작됨을 말한다. 노동의 재료를 빌려준다는 것은 자신의 자유를 정초(定礎)한다는 것을 말한다.”(p52) 자본가에게 축적되고 저장되는 것은 ‘자본’이지만 노동자에게 축적되고 저장되는 것은 ‘소외’이다.

웨스 크레이븐은 미국의 생산성이 정체상태에 있던 90년대 초에 이 영화를 만든다. 이 시기에 미국은 ‘이라크’를 공격(영화 속에 잠시 등장한다)하고 소모를 통한 축적이랄 수 있는 현재에까지 이르는 방식을 어둠 속에서 끄집어 올린다. 물론 영화에서는 이후가 아니라 이전, 부를 축적해왔던 ‘폭력’을 상기시키기 위한 방식으로 쓰인다. 91년의 미국은 82년 이후 9년 만에 찾아온 마이너스 성장의 해이긴 했지만 국가 전체가 위기에 몰리는 그런 상태는 아니었다. 유럽과 일본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졌을 뿐, 74~75년처럼 심각한 불황은 아니었다. 다만 “노동자와 자본가가 똑같이 어려움에 처해있는 곳에서는 노동자는 그들의 생존에 어려움을 겪지만 자본가는 자신의 죽은 맘몬 (( 히브리어로 화폐라는 뜻 )) 의 이득에서 어려움을 겪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p16)

불황의 시기에는 대체로 양극화의 현상이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사회의 부가 성장하는 시기에는 노동자에게 유리한 상황임에도 노동자 사이의 경쟁이 격화되어 스스로 탐욕에 봉사하기 위한 자본가의 노예노동 상태에 이른다. 이 시기에는 외부를 살필 수가 없지만 부가 최종적으로 증가한 상태 이후로는 생산성의 감소와 부의 쇠퇴로 노동자 전체가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이 불황의 시기에 노동자는 양극화를 실제로 목격하게 되지만 별다른 힘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니까 “살아가기 위해서 무산자들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유산자들에 대한 봉사에, 즉 그들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p29) 웨스 크레이븐의 영화는 이 시기를 다룬다.

영화의 시작은 한 소년의 앞날을 보여주는 타롯 점으로 시작한다. 소년의 앞길은 온통 고난과 두려움으로 점철되며 결국 낭떠러지에 몰려 죽음에 이르는 이 점괘는 관객에게 앞으로 소년에게 닥칠 고난과 역경을 알려주는 장치로 사용되며, 이어서 소년을 둘러싼 환경을 제시해 줌으로써 소년에게 닥쳐올 고난과 소년을 둘러싼 환경이 결국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음을 드러내 준다. 이어서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먹이를 둘러싼 개들의 싸움은 소년에게 제시된 카드 점을 뒤집어서 보도록 관객에게 대놓고 말한다. 마치 ‘당신들이 앞으로 볼 영화의 내용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하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리고 영화는 정말로 친절하게 하나하나 설명해 나간다.

이제 소년을 둘러싼 환경을 제공한 자들이 영화에 등장한다. 이들은 악덕 자본가이며 지주이고 인육을 먹는 ‘괴물’로 그려지는데 이들은 서로 이름을 부르는 대신 남자는 ‘아빠’로, 여자는 ‘엄마’로 불린다. 여기서 여자는 자신을 오로지 ‘엄마’의 자리에 위치시키는 반면에 남자는 ‘아빠’이면서 자신의 ‘남성’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는 자로 그려지는데 이는 ‘Mom’이 단일 의미인 반면에 ‘Man’이 다양한 의미를 수용하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아빠인 Man과 엄마인 Mom은 결합하여 ‘Mammon’ 곧 ‘화폐’가 되며 이 둘은 당연하게도(?) 하나의 핏줄에서 이어지는 ‘남매’이다. 즉 그들은 둘이자 하나이기도 하다. “화폐의 속성의 보편성은 그 본질의 전능성이다. 그런 까닭에 화폐는 전능한 존재로 간주된다.”(p174) 이 남매 역시도 그들의 공간에 균열이 생기기 직전까지는 그들의 공간에서만큼은 전능한 존재로 그려진다.

이들은 그들의 ‘지대’를 이용하고자 마지막 남은 주거자인 소년의 가족을 내쫓으려 하는데 “사회 상태의 모든 개선은 직접적으로 건 간접적으로 건 지대를 상승시키고 토지 소유주의 실질적인 부, 다시 말해서 타인의 노동 혹은 그것의 생산물을 구매할 수 있는 힘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p67) 움직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지주의 권리는 약탈에 그 기원을 두고”(p59) 있기에 소년은 생존을 위해서 움직여야 하고, 그의 첫 번째 선택은 이와 비슷한 약탈을 선택하지만 당연하게도 첫 번째 시도는 실패하고야 만다. 그러나 소년은 이 첫 번째 시도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익히게 된다. “인간에 대한 죽은 물질의 지배”(p77)가 이뤄지는 방식에서 결국 소년은 이 모든 것을 박살 내야 함을 깨닫는다.

소년은 첫 번째 실패의 대가로서 하나의 ‘금화’를 얻어내는 데는 성공한다. 그의 할아버지로부터 “2천 년 된 금화”라는 판정을 받은 이 금화는 이들 지주의 본질을 정확하게 드러낸다. 늘 ‘지옥 불의 심판을 받으리라’는 경구를 입에 달고 사는 이들 부부는 “철학의 더러운 오점이던 신학”(p11, p117) 곧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너희는 하느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마태오 6:24)”는 구절처럼 2천 년 이전부터 인간을 지배해온 것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이어지는 “세대가 지날수록 점점 미쳐갔지. 처음에는 장의사로 싸구려 관을 비싸게 팔고, 부동산으로 돈을 벌고, 부자가 될수록 탐욕스러워지고, 그럴수록 미쳐갔지”라는 할아버지의 말은 “인간이 적대적 존재를 지배하려 할수록, 인간으로서는 더욱더 빈곤해지고 더욱더 많은 화폐가 필요하게 되며, 그의 화폐의 힘은 생산의 양과 완전히 반비례 관계, 다시 말해서 화폐의 힘이 증대함에 따라 인간의 곤궁도 증대한다.”(p145)는 말과 같다. “화폐의 양이 점점 더 인간의 유일한 힘있는 속성이 된다.”(p145)는 말이다.

소년은 두 명의 인간과 화폐의 일대일 교환을 통해서 겨우 금화 한 닢을 획득하고, 이들 남매는 인간으로부터, 지대로부터, 화폐로부터 계속해서 부를 획득한다. 웨스 크레이븐은 이러한 과정을 소년이 악전고투―일종의 노동행위―를 통해 겨우 금화 한 닢을 획득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에 반해 남매가 부를 쌓아가는 과정은 단 몇 마디로 명쾌하게, 그리고 무시무시하게 설명해버린다. 이제 소년은 최초의 타롯 점에서 예측 가능했던 데로 다시 화폐의 성으로 들어가는데 이를 위해 소년이 이용하는 것은 ‘법률’이라는 방법을 통해서이다. “노동자 위에 군림하고 노동자에 대해 법률을 명령”(p21)하는 자본가를 골탕먹이기 위해 이를 이용하는 소년은 이제 혁명가로 거듭나고 부의 생산에 복무하며 “정신박약 과 백치”(p88)가 돼버린 사람들을 구원하기에 이르는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동물적인 것을 인간적인 것으로 돌리는 행위이며 동시에 이들 동물과 같은 인간과 함께 혁명=폭발을 통해서이다.

부의 분배, 영화의 결말은 사악한 부자를 박살 내고 고난에 빠진 이웃을 구해내는 것으로 “지양된 사유재산의 적극적 표현이며, 무엇보다도 보편적 사유재산”(p124)이라는 공산주의를 향한 혁명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곳은 여전히 미국 내의 한 마을이며 “공산주의는 임박한 미래의 필연적인 형태이며 에너지로 충만한 원리이지만, 공산주의는 그 자체로 인간 발전의 목표―인간적 사회의 형태―가 아니다.”(p142) “사유재산의 최초의 적극적 지양인 조야한 공산주의란 자기 자신을 적극적인 공동체적 존재로서 정립하고자 하는 사유재산의 저열함의 현상 형태일 뿐”(p124)이기 때문이다.

웨스 크레이븐의 〈공포의 계단〉은 선동적인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앨리스가 도착했던 거울 나라처럼 현실의 이면을 보여주는데 만족하는 영화다. 때문에 영화는 마치 소년―허풍쟁이(fool)가 꾸는 꿈처럼 결말을 맺는다. 그러나 그 달콤한 꿈의 바탕에는 소년을 조마조마하게 했던 현실이 있는 것 역시 사실이기도 하다. 대체로 사람들은 어떤 체제에 대해서 가지는 환상만큼이나 현실을 종종 무시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