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없이 많은 영화 가운데는 반복해서 만들어지는 영화들이 있다. 끝내주는 아이디어를 지닌 작품들, 혹은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성으로 언제 만들어도 그 힘을 잃지 않는 작품들, 혹은 이야기의 재미가 언제나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이 그렇다. 그리고 여기에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문학 작품을 영상화한 작품들도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오즈의 마법사』 같은 독특한 이야기들은 그 자체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기도 했으나 수많은 작품에 영감을 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드라큘라』나 『프랑켄슈타인』 그리고 『바디 스내처』와 같은 작품들은 호러의 하위 장르를 이르는 고유명사가 되기도 했다. 여기에 “고딕 장르”라는 새로운 세계를 연 『오트란토 성』이나 『나사의 회전』과 같은 작품들도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고딕 호러에 풍부하면서도 싸늘한 숨결을 불어 넣은 작품들이다.

다프네 뒤 모리에의 소설 『레베카』는 고딕 소설의 전통에 속한 작품이다. 소설은 주인공인 “나”의 회상으로 구성된다. 부유한 노부인의 시중 겸 말벗을 하던 “나”는 우연히 만난 귀족 “맥심”과 사랑에 빠진 다음 곧바로 결혼한다. 둘은 짧은 신혼여행을 끝내고는 그 아름다움으로 칭송이 자자한 맥심의 저택 맨덜리로 들어간다. 그러나 이곳은 “나”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맨덜리는 “레베카”의 망령에 사로잡힌 공간이고, 이곳에서 “나”는 맥심의 애정을 회의하며, “덴버스”의 시선에 주눅 든 채 걱정과 근심과 불안을 벗 삼아 살아가게 된다. 내가 아는 세계와 전혀 다른 공간에 도착한 사람의 이야기. 우리는 이미 이러한 이야기를 알고 있다. 『레베카』는 혹시나 의심하는 이들을 위하여 맥심의 말을 통해 그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전달해준다. 『레베카』에서 맨덜리의 주인인 맥심은 가면무도회를 준비하는 주인공인 “나”에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면 좋을 것 같은데”라고 말한다.

『레베카』는 두 편의 영화와 함께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다. 물론 여기서 뮤지컬은 다루지 않는다(물론 보지도 못했다). 우리가 가장 접근하기 쉬운 작품은 두 편의 영화인 알프레드 히치콕의 『레베카』와 벤 휘틀리의 『레베카』이기 때문이다. 히치콕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감독이다. 그의 작품들인 [이창]과 [현기증] 그리고 [싸이코]와 같은 영화들은 영화를 한 차원 높이 끌어올린 작품들이다. 이에 반해 벤 휘틀리는 2011년 작인 [킬 리스트]로 우리에게 알려진 감독이다. [킬 리스트]는 형사인 주인공이 마치 우리를 [영혼의 카니발]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듯한 독특한 영화다. 이처럼 인상적인 작품 다음에 아주 시니컬한 코미디인 [살인을 부르는 관광객]을 만들었다. 그러나 2015년 작인 [하이-라이즈]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으며, 그다음 영화인 [프리 파이어]는 그보다 조금 나아졌을 뿐이다.

히치콕의 [레베카]는 비록 데이비드 O. 셀즈닉의 간섭을 받기는 했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제작 때문에 얼이 빠져있던 셀즈닉의 간섭이 다른 영화들에 비해 약했던 영화였다. 물론 셀즈닉은 히치콕의 [레베카]에서 원작 『레베카』에는 그림자조차 존재하지 않는 코믹 시퀀스들을 모두 (물론 마지막 시퀀스에는 남아있다)제거하기는 했다. 이러한 셀즈닉의 판단은 그가 [레베카]에 행한 가장 큰 기여가 아닐까 싶다. 히치콕의 [레베카]는 난데없이 낯선 세계에 빠져들어 간 인물의 두려움과 혼란을 히치콕 특유의 빛과 그림자를 통해 만들어낸 세계다. 또한, 원작의 주요 요소들이 적절하게 요약돼 있으며, 원작에 존재하지 않는 시퀀스들은 영화를 더욱더 풍요롭게 하고 있다. 특히, 맨덜리와 함께 잡아내는 “덴버스”의 마지막 장면은 원작의 결말을 초월한다고 할 수 있다.

벤 휘틀리의 [레베카]는 조금 이상한 영화다. 휘틀리의 영화에는 가면무도회 초청장 작성 장면을 통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정확한 시대가 나온다. 그러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자동차와 같은 몇몇 요소들을 제거하면 우리는 이 영화가 시대극이라는 느낌을 전혀 받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것은 시대적 배경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휘틀리가 만든 [레베카]의 또 다른 문제는 감독이 마치 영화 속에서 방황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벤 휘틀리의 [레베카]는 곳곳에서 원작을 따르는 동시에 히치콕의 요약과 장면들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그가 만들려는 작품이 뒤 모리에 혹은 히치콕의 고딕 미스터리인지 아니면 영화적 전통에서의 고딕 호러인지가 종종 애매해진다는 점이다.

고딕 호러가 고딕 문학을 영상화하면서 강조한 지점은 빛과 어둠이다. 고딕에서 어둠은 죄의 상징이다. 고딕 ‘문화’에서 등장인물들이 검은 드레스를 입고 나오는 것은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한다는 뜻이지만, 고딕 영화에서 검은 드레스는 죄와 함께 음모와 비밀 또한 포함한다. 그것은 거대한 저택에 지배당한 사람들의 죄와 죄의식이고 빛은 그러한 죄를 밝혀주는 기능을 한다. 벤 휘틀리는 이러한 죄를 그려내는 상징적 장면으로 원작에는 존재하지 않는 맥심의 몽유병이란 장치를 활용하지만, 이는 작품의 창조적 활용이기보다는 고딕 호러 영화의 진부한 모방으로 보일 뿐이다. 뒤 모리에의 장면과 히치콕의 장면들 그리고 감독이 창작한 장면들은 한데 어울리지 않은 채 서로가 따로 놀고 있다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그렇다면 히치콕은 어떠한가. 히치콕의 [레베카]는 히치콕의 장기 가운데 하나인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촬영을 논외로 하더라도 이 영화의 재빠른 템포는 관객이 지루해할 틈을 주지 않는다. 사실 1인칭 시점인 뒤 모리에의 『레베카』는 이야기 전체가 “나”의 관점으로 진행됨으로써 독자를 “나”의 망상과 끊임없는 회의 속에 빠트리고 있다. 이건 정말 끔찍한 이야기 진행 방식이다. 독자는 “나”의 망상 속에 빠져들고 싶지 않음에도 한없이 “나”의 생각 속으로 빠져 들게 된다. 그러나 히치콕은 관객에게 그럴 틈을 주지 않는다. 분명 원작에 묘사된 것처럼 히치콕의 “나”는 맨덜리와 덴버스로 인해 주눅 들어 있는 상태이다. 그럼에도 관객이 “나”의 태도에 지치지 않는 것은 분명 히치콕 영화의 경쾌한 리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히치콕의 [레베카]에서 “나”를 연기한 조앤 폰테인의 연기는 특별히 언급해 둘 가치가 있다. 조앤 폰테인은 뒤 모리에가 창조한 『레베카』의 “나”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방식 그대로 연기한다. 물론 여기에는 영화 제작 내내 조앤 폰테인을 격려하는 동시에 주변 인물들에게 그녀를 무시하라는 히치콕 특유한 배역 만들기 방식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폰테인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세계가 짓누르는 상황을 그녀만의 주눅 든 연기를 통해 적절하게 표현해낸다. 그렇다면, 벤 휘틀리의 “나”는 어떠한가. 릴리 제임스는 분명 나쁜 연기자는 아니다. 벤 휘틀리는 『레베카』의 ‘나’를 히치콕 시대의 인물로 그리고 싶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영화 속에서 표현되는 “나”의 모습은 거대하고 음침한 세계에 짓눌리는 모습이 아니라 그저 낯선 곳에 적응하려는 한 인간의 모습으로 비칠 뿐이다.

사실 『레베카』에서 가장 강렬한 인물은 “덴버스 부인”이다. 원작에서 “덴버스 부인”은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지만, 그렇다고 작품 끝까지 감정을 숨기는 인물은 아니다. 벤 휘틀러에 이르러서 표현된 “덴버스 부인”은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거대 저택의 관리자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영화의 마지막 장면 역시 그리 인상적일 게 없다. 그러나 히치콕이 묘사한 “덴버스 부인”은 아마도 영화 사상 가장 무시무시한 캐릭터 가운데 한 명으로 손꼽아도 손색이 없다. 주디스 앤더슨이 연기한 “덴버스 부인”은 그야말로 고딕 세계 그 자체를 체화한 듯한 인물이다. 원작의 “덴버스 부인” 역시 레베카의 망령에 사로잡힌 존재였으나 주디스 앤더슨이 창조한 “덴버스”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 외에도 언급해야 할 많은 내용이 있지만(이를테면 『레베카』에서 찾아낼 수 있는 의미와 맥심을 연기한 배우들이나 극을 둘러싼 시대 같은), 또다시 글이 기어지고 있으니 여기서 마무리하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만약 단 한 편의 “레베카”를 읽거나 보고 싶다면, 히치콕의 [레베카]를 보시는 걸 추천한다. [레베카]는 잭 클레이턴이 『나사의 회전』을 통해 창조한 [공포의 대저택]과 함께 고딕 영화 사상 최상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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